[이야기해 봅시다]국순당 배상면회장 vs 중앙대 정헌배교수

  • 입력 2002년 9월 1일 17시 45분


국순당 배상면 회장(왼쪽)의 말에 정헌배 중앙대 교수가 무릎을 치며 동의한 후 즐거이 건배하고 있다. 서울 중구 서울파이낸스센터 빌딩 안에 있는 한식당 ‘배상면주가’에서 이뤄진 두 사람의 대담은 만남의 장소부터 ‘전통과 첨단의 대화’를 상징하는 듯했다. /원대연기자 yeon72@donga.com
국순당 배상면 회장(왼쪽)의 말에 정헌배 중앙대 교수가 무릎을 치며 동의한 후 즐거이 건배하고 있다. 서울 중구 서울파이낸스센터 빌딩 안에 있는 한식당 ‘배상면주가’에서 이뤄진 두 사람의 대담은 만남의 장소부터 ‘전통과 첨단의 대화’를 상징하는 듯했다. /원대연기자 yeon72@donga.com
지난달 29일 서울 중구 무교동의 서울파이낸스센터 지하 1층 ‘배상면주가(酒家)’.

평생을 전통주 개발에 매달려온 국순당 배상면(裵商冕·78) 회장과 10년 넘게 인삼주를 연구해온 주류산업 전문가 정헌배(鄭憲培·47)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가 마주 앉았다.

한달에 서너차례 만날 때마다 한국 전통주의 미래를 걱정하는 두 사람은 이날도 전통주에 대한 얘기로 대화를 시작했다.

편안한 국악 가락에 귀기울이던 한복 차림의 배 회장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전통주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없어서 큰일이에요. 어떤 분야든 한가지에 매달려 몰두하고 연구해야 조금이라도 알 수 있는 법인데…. 언젠가는 우리 후손들이 일본식으로 만든 희석식 소주나 위스키, 와인만 마시게 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어요.”

정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우리 조상이 마시던 술을 그대로 재현한 전통주는 이제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전통주 제조기술이 전수가 안된 거지요. 정부가 1990년대 들어서야 전통주 육성의 중요성을 깨닫고 전통주 명인(名人)들을 찾아 나섰지만 대부분 세상을 떠났지요. 지금이라도 제대로 문헌을 고증해서 우리만의 술을 이어가야 합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연구개발(R&D)의 중요성으로 옮겨갔다.

“연구를 안 하는 기업은 망하게 돼 있습니다. 무엇이든 완전한 것은 없지요. 끊임없이 개선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정 교수)

“백세주도 마찬가지예요. ‘오십세주’를 마시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그만큼 백세주의 맛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겁니다. 지금 백세주가 아무리 잘 팔린다고 해도 연구를 게을리하면 소비자들로부터 외면당할 수도 있어요.”(배 회장)

배 회장은 사람들이 자신이 평생을 바쳐 맛과 향을 개발한 백세주에 소주를 섞어마시는 점을 아쉬워하는 듯했다.

배 회장은 경북대 농화학과 재학시절에 미생물연구반을 조직하면서부터 누룩 연구에 파묻혔다. 전통주를 되살려야겠다는 생각에 연구를 시작했고 문헌 고증을 통해 1992년 백세주를 개발했다. 백세주의 폭발적인 인기 덕분에 94년 20억원이었던 국순당의 매출액은 작년에 984억원으로 뛰었다.

정 교수는 잠시 옛날을 회상하듯 말을 멈춘 배 회장의 잔에 백세주를 따르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백세주의 성공은 한국 전통주의 미래는 물론, 크게 보면 한복이나 떡 같은 우리나라 전통 산업의 선진화에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훌륭한 제품을 개발하고 최신 마케팅 기법을 접목시키면 낙후된 전통 산업을 되살릴 수 있을 겁니다.”

‘충전이 떨어진 것 같다’며 한쪽 귀에 꽂고 있던 보청기를 주머니에 집어넣은 배 회장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옛날 방식을 고집하면 첨단을 좇는 신세대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가 없습니다. 시대가 바뀌면 방식도 바뀌어야죠. 가장 중요한 건 품질을 표준화하는 겁니다. 만들 때마다 제품이 다르면 믿고 살 수가 없죠. 전통주라고 나오는 것들도 대부분 그렇거든요.”

어느새 두 사람은 백세주 한 병을 비웠고 식탁 위에는 또 다른 약주 ‘산사춘’이 올라왔다.

산사춘은 배 회장의 막내 아들 영호씨가 경영하는 배상면주가에서 만드는 술. 배 회장은 자연스럽게 자녀들 얘기를 꺼냈다.

“중호(국순당 사장, 배 회장의 맏아들)는 사람을 잘 쓰는 재주가 있지요. 영호는 아이디어가 많습니다. 국순당이라는 이름과 백세주라는 이름도 영호가 지었지요.” 영호씨는 국순당에서 형 중호씨와 함께 일하다가 96년 독립해 배상면주가를 설립했다.

배 회장의 얘기가 길어졌다.

“예전에는 일부러 두 아들의 경쟁을 유도했습니다. 경쟁이 없으면 게을러지고 경쟁력이 점점 떨어지니까요. 지금은 두 아들에게 각자 경영능력을 충분히 입증했으니 이제 합치라고 합니다. 합치면 좀 더 큰 일을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중호씨와 영호씨 사이에 있는 딸 혜정씨에 대한 대목에서는 배 회장의 목소리가 잠시 떨렸다. 혜정씨가 경영하는 탁주전문업 ‘배혜정누룩도가’가 아들들 회사만 못하기 때문이다.

“두 아들은 잘하고 있는데 딸은 너무 고생을 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정 교수는 “회장님은 2세 경영의 길은 잘 닦아놓으신 겁니다. 재산을 나눠주기보다 기술을 나눠줬으니까요. 물고기를 주는 것보다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신 것 아닙니까”라며 배 회장을 치켜세웠다.

정 교수는 이어 전통주 기술인력 양성에 대한 배 회장의 열정을 예로 들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론’ 얘기를 꺼냈다.

“회장님께서 경북대에 사재를 출연해 대학원에 전통주 제조과정을 만드셨지요.”(정 교수)

“인력 양성이 제일 시급한 문제니까요. 일주일에 3번씩 강의도 나가야 합니다.”(배 회장)

“힘드시지 않겠습니까.”(정 교수)

“가르치다 죽지요, 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내가 가진 기술을 사회에 남기는 것 아니겠어요.”(배 회장)

배 회장은 아들들 눈치 안 보고 맘껏 연구에 몰두하기 위해 이달 초에는 ‘배상면주류연구소’를 설립했다.

“아무쪼록 배상면 일가가 전문성을 갖춘 명가(名家)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기를 바랍니다.”(정 교수)

“앞으로 쌀포도주 개발에 매달리려고 합니다. 얼마 전 옛 문헌을 뒤져보니 우리 조상들이 쌀과 포도만으로 술을 담가 마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와인에 대적할 수 있는 우리만의 술이 될 수 있을 겁니다.”(배 회장)

이때 팔순을 앞둔 배 회장의 눈이 20대 청년처럼 힘있게 빛났다.

신치영기자 higgledy@donga.com

■배상면 회장은

△1924년 대구 출생

△50년 경북대 농예화학과 졸업

△69년 한국미생물공업연구소

창립

△82년 생쌀발효법에 의한

전통술 제조특허 취득

△92년 국순당 설립

△88년∼현재 국순당 회장

■정헌배 교수는

△1955년 경북 구미시 출생

△74년 영남대 경영학과 졸업

△84년 파리9대학 경영학박사

△85년 이후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

△98년 중앙대 산업경영연구소장, 인삼산업연구센터 소장

△현재 한국환경경영학회장,

총리실 산하 청소년보호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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