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하이데거와 화엄의 사유´

  • 입력 2002년 8월 30일 17시 35분


◇하이데거와 화엄의 사유/김형효 지음/833쪽 3만5000원 청계출판사

정신문화원의 김형효 교수는 2년여 전에 출간된 ‘하이데거와 마음의 철학’에서 하이데거의 후기사상과 불교의 화엄학 및 선학을 비교하는 연구서를 집필할 것을 약속했었다.

그는 자신의 약속을 이번에 발간된 ‘하이데거와 화엄의 사유’를 통해 훌륭하게 지킨 셈이다. 8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앞에 두고 우선 느끼는 것은 해가 거듭해도 수그러들 줄 모르고 오히려 치열해져만 가는 노(老)교수의 학문적 열정과 힘에 대한 경탄과 존경이다. 60이 넘은 나이에 하이데거의 전기사상과 불교의 유식학을 비교하는 야심작인 ‘하이데거와 마음의 철학’을 내놓은 지 2년이 채 지나지도 않아, 그는 다시 하이데거의 후기사상과 불교의 화엄학을 모든 측면에서 철저하게 비교하고 있는 방대한 책을 내놓은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존재와 소유, 깨달음과 경제과학, 마음의 가난과 시장의 돈, 농부의 마음과 상인의 의식’ 사이의 투쟁에서 후자가 극단적인 우위를 점하게 된 시대가 현대의 기술문명이라고 보고 있다. 이러한 시대인식은 현대 기술문명을 ‘신들은 사라지고, 세계와 대지는 황폐하게 되고, 인간은 대중으로 전락하고, 진정한 의미의 창조와 자유에 대한 증오와 의심이 만연되어 있는 시대’로 보는 하이데거의 시대인식과 상통한다.

저자에 의하면 하이데거의 후기사상은 ‘소유와 경제와 과학기술에 집착하는 인간 중심주의의 사상을 넘어서 인간이 ‘마음의 가난’을 다시 기억하고 그러한 가난한 마음에서 열려오는 존재의 빛 안에 인간이 거주할 것’을 촉구하는 사상이다. 그는 소유욕과 지배욕이 아니라 이렇게 마음의 가난을 말하는 하이데거의 사상은 무(無)와 공(空)의 신비를 깊이 체득할 것을 역설하는 불교의 화엄학과 동일한 사태를 지향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입각하여 저자는 하이데거의 후기사상과 화엄학 간의 대화를 매개하고 있다. 동서철학을 비교하는 많은 연구들이 보통 양자간의 유사한 점들을 단순히 병치하는 것으로 시종하는 반면에, 이 책은 인간과 세계와 사물, 서양 형이상학과 현대기술문명의 본질, 사유와 언어 그리고 예술의 본질 등을 하이데거의 후기사상이나 불교의 화엄학 중 어느 하나에만 의거할 때보다도 훨씬 더 풍요로우면서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와 함께 이 책은 비교되는 사상들 간의 생산적인 대화를 매개하는 것을 통해 사태 자체를 보다 철저하게 규명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비교철학적인 작업의 한 전범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책은 하이데거의 후기사상과 화엄학과의 대화를 매개하는 것을 통해서 이 시대에 철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주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냉전시대의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는 철학이 정치의 시녀에 불과한 것이었다면, 냉전이 끝나고 전 세계가 과학기술의 개발에 매달리고 있는 현실에서 철학은 과학의 시녀로 전락해 있다. 그나마 이 시녀는 정작 자신이 봉사하는 과학이 전혀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고 거들떠보지도 않는 비참한 시녀에 불과하다. 저자는 오늘날 인문학, 특히 그 중에서 철학의 죽음이 운위되는 것은 철학이 이렇게 과학의 시녀로 전락한 데에 있다고 본다. 그는 이러한 상태에서 철학이 벗어나는 것은 철학이 하이데거의 후기사상이나 화엄학 선학처럼 정신의 깨달음에로 입문(initiation)하는 길을 제시하는 학문이 될 경우에만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박찬국 서울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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