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김영식/남북 외교의 썰렁한 만남

  • 입력 2002년 8월 2일 18시 51분


장면1: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회의장.

“안녕하십니까.”(북한 백남순·白南淳 외무상)

“멀리서 오셨습니다.”(최성홍·崔成泓 외교통상부 장관)

장면 2:ARF회의 도중 휴식시간.

“회의장 에어컨이 너무 강해 춥지 않습니까.”(최 장관)

“아 그렇습니다. 너무 추운데요.”(백 외무상)

아무리 재미없는 연극에서도 이런 대사를 읊조리지는 않을 것이다. 시쳇말로 썰렁함 그 자체다. 그러나 브루나이 ARF회의에 동석한 남북 외무장관이 실제로 주고받은 말은 이 두 마디뿐이었다. 2년 전 같은 무대에서 협조를 다짐하던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두 사람은 모두 “못 만날 이유가 없다”는 말은 자주 했으나 “먼저 만나자고는 하지 않겠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아 두 사람의 만남은 불발로 그쳤다.

북한이 세심한 준비를 해서 대미, 대일 외교에 나섰다는 것은 누가 봐도 분명해 보였다. 백 외무상의 ‘주가’를 보여주듯 그의 주변에는 항상 20∼30명의 한국 및 외국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1일 기자들이 “미국은 북한과의 대화 재개에 합의한 적이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 거냐”라고 묻자 “허 참, 그 사람들…(허허허) 대화를 하기로 합의했소”라며 전에 없는 ‘자신감’을 내보였다. 콜린 파월 미 국무부 장관에게는 “북한을 친구로 대해 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남북외무장관회담은 철저히 외면했다.

73세의 노련한 백 외무상은 남측이 왜 먼저 만나자고 할 수 없는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서해교전으로 받은 남한측의 상처가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2일부터 남북장관급회담을 위한 실무접촉이 시작되긴 했지만 두 사람의 ‘썰렁한 만남’은 햇볕정책의 현주소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반다르세리베가완(브루나이)에서>=김영식기자 정치부 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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