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관따라 정책이 춤춘다]'2000억 청사진'태권도공원 "없던일로"

  • 입력 2002년 7월 25일 18시 16분


군내 곳곳에 붙어있던 플래카드가지금은 모두 철거된 채 방치돼있다. - 장기우기자
군내 곳곳에 붙어있던 플래카드가
지금은 모두 철거된 채 방치돼있다. - 장기우기자
《장관이 바뀔 때마다 정책이 바뀌거나 폐기되는 일이 자주 발생함으로써 생기는 문제는 국민 혈세의 낭비와 정부에 대한 불신이 대표적이다. 특히 적은 예산을 쪼개 써야 하는 지방자치단체들이 관련된 경우 자치단체들이 받는 타격은 매우 크다. 장관에 따라 춤추는 정책의 대표적인 사례들을 따져본다.》

▼혼선빚은 사례들▼

▽태권도 공원 조성 사업〓2000년 4월 3일 박지원(朴智元)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은 기자회견을 열어 “태권도를 21세기 국가전략상품으로 육성하기 위해 2007년까지 8년 동안 2000억원을 투입해 100만평 규모의 태권도 성전(공원)을 건립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문화부는 태권도 전당, 태권도 수련단지, 한방기공단지, 영상단지, 관광단지, 호국청소년 단지 등 6개 시설이 들어설 이 공원이 건립되면 연간 150만명이 방문해 1300억여원의 수입을 올릴 것이라는 장밋빛 청사진도 내놓았다.

이에 따라 전국의 30여개 자치단체들이 태권도 공원 유치를 최대의 현안 사업으로 설정했다. 일부 광역자치단체는 공원 유치의 당위성을 알리는 TV 광고를 내보내고 1억원가량의 예산을 들여 홍보용 CD를 제작하기도 했다.

최종적으로 21개 자치단체가 그 해 5월 말 문화부에 후보지 신청서를 냈으며 7월에는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일괄적으로 설명회를 갖기도 했다.

자치단체들은 이 같은 절차가 끝난 뒤에도 문화부의 현지 실사에 대비해 태권도와의 연고를 주장할 수 있는 유적을 정비하고 태권도를 주제로 한 세미나를 유치했다. 일부 자치단체는 갑자기 태권도팀을 창단했으며 외국인들을 동원해 ‘세계태권도대회’를 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태권도 공원 유치전 열기는 그 해 10월19일 갑자기 식어버렸다. 후임 김한길 장관이 국회 국정감사에서 “태권도 공원 조성 사업의 착수 시기와 규모, 예산 조달 방안 등에 대해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문광부 관계자는 “태권도 공원 사업은 아직도 진행 중이며 연내에 현장 실사를 할 계획”이라며 “타당성 조사 결과 시행은 하되 규모를 줄이는 게 바람직하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관계자는 “사업을 추진하더라도 다음 정권에서나 가능하지 않겠느냐”며 “확보된 예산이 없어 새 정권에서도 사업 추진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항 항만공사 설립〓부산시는 지방자치가 시작된 1990년대 초부터 ‘항만공사’(PA·Port Authority) 설립을 요구해 왔다. 항만공사란 항만 운영에 정부 참여를 줄이고 민간의 참여를 늘려 경쟁력을 높이려는 기구.

99년 2월 김선길(金善吉) 당시 해양수산부장관은 정부조직 경영 진단 결과 이 같은 의견이 나옴에 따라 항만공사 설립에 착수했다. 하지만 후임 정상천(鄭相千) 이항규(李恒圭) 장관 등은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 후임 노무현(盧武鉉) 장관은 부산시와 공사 설립의 기본 골격에 합의하는 등 의욕을 보였지만 재임 기간에 약속을 이행하지는 못했다.

공사 설립은 지난해 말 관련 법이 입법예고돼 현재 법제처에서 법안을 심사 중이지만 참여 범위를 놓고 정부와 부산시의 입장이 크게 달라 난항이 예상된다.

▽울산 공업역사박물관 건립 계획〓2000년 11월 김한길 당시 문화부장관은 공업역사박물관 건립 용역비로 8억원을 울산시에 지급했다.

울산 북구 강동동 일대 10만여평에 국비 2980여억원을 들여 공업 역사를 한눈에 조감할 수 있는 박물관을 만들기로 한 것. 이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99년 6월 울산시를 방문해 약속한 사항이었다.

순항하던 이 사업은 2001년 1월 주무 부처가 산업자원부로 옮겨지면서 틀어지기 시작했다. 신국환(辛國煥) 장관은 사업 축소를, 후임 장재식(張在植) 장관은 자동차 박물관으로 대체 건립할 것을 주문했다.

정부가 박물관 설립을 약속한 지 2년 만에 사실상 손을 뗀 것이다.

▽수도권 공장 규제 완화〓산자부는 지난달 입법 예고한 ‘공업 배치 및 공장 설립에 관한 법률(공배법)’ 개정안을 통해 정보통신 등 신산업의 집적도를 높이기 위해 지식기반산업집적지구 내 신설 공장은 수도권 공장 총량제 규제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개정안은 수도권 공장 규제를 완화하는 방향의 공배법 시행령 개정안을 내놓아 수도권 이외 지역 자치단체들의 ‘양보’를 얻어낸 지 5개월도 지나지 않아 나왔다.

이에 앞서 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수도권 정비위원회는 2000년 9월 공장 수요가 늘자 수도권 공장 허용 면적을 추가로 13만6000만㎡를 배정하는 대신 앞으로는 개별 입지(개인공장 등)에 대한 물량 배정을 엄격히 제한하고 공장 총량제도 계획 입지 위주로 운영하겠다고 의결했다.

그러나 위원회는 2001년 5월 개별 입지 물량을 대폭 늘리고 계획 입지를 총량 규제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일관성을 잃었다는 지적을 받게 됐다. 대전〓지명훈기자 mhjee@donga.com

부산〓조용휘기자 silent@donga.com

울산〓정재락기자 jrjung@donga.com

청주〓장기우기자 straw825@donga.com

강형기

(충북대교수 ·지방행정)

▼전문가 진단▼

우리 국민은 정부의 정책 실패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편이다. 정책 실패가 가져오는 사회적 비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장관 등 고위 공직자의 즉흥적인 정책 결정이다. 권한의 사물화(私物化)를 통해 나오는 이 같은 정책 결정은 실패의 가능성이 높다.

문화관광부가 추진했던 ‘태권도 공원 건립 사업’이 좋은 사례다. 이 계획이 발표되자 전국의 수많은 자치단체들이 유치전에 나섰지만 원점에서 타당성 조사를 해야 한다는 발표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동안 공원을 유치하기 위해 돈과 인력이 얼마나 낭비됐는지도 궁금하다. 특히 자치단체들이 이 일로 정부에 깊은 불신을 갖게 됐다면 단순히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손해가 아닌가.

정부의 국책사업 결정 과정의 문제점은 이번에도 여실히 드러났다.

첫째, 정책조정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문화부는 태권도 공원 사업을 발표한 뒤 당초 예비 타당성 조사만으로 추진했다가 관계장관 회의와 국정감사에서 제동이 걸리기도 했다.

둘째, 공식 비공식 라인을 통해 의견을 듣는 자문장치가 결여돼 있어 발표부터 한 뒤에 이해 관계자들의 의견을 듣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점이다.

셋째, 정책의 연속성 문제다. 전임 장관의 정책을 후임 장관이 잘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넷째, 한건주의와 조급함이 팽배해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자신의 재임 시절 큰 일을 이뤄놓겠다는 욕심을 불러 면밀한 사전조사 없이 새로운 정책을 발표하곤 한다.

이 같은 문제점은 고질적이기는 하지만 해결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정책 결정 시스템을 제대로 활용하는 게 그 해답이다.

▼日무사시노市의 경우▼

일본의 작은 도시인 도쿄(東京)도 내 무사시노(武臟野)시의 시립 유치원 건립 과정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인구 13만5000명의 무사시노시는 1988년 3월 시립 유치원 건립에 대비해 ‘무사시노시 아동시설 기본 방침 및 집행 방향’이라는 원칙을 만들었다.

이 원칙은 몇몇 사람의 머리에서 급조된 게 아니었다. 무려 1년반 동안 유아 전문가와 아동시설 운영자 등을 초빙해 24번의 세미나와 3번의 설문조사, 한 번의 시민공청회를 거치는 간단치 않은 작업 끝에 결실을 본 것이다.

시는 원칙을 수립한 뒤에도 한 동네에서 시립 유치원으로 만들 만한 사립 유치원이 매물로 나오자 위원회를 만들어 구입한 뒤 시립 유치원으로 전환할 것인지를 놓고 정밀 검토 작업을 벌였다.

그 결과 구매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결론이 나오자 다시 기존 개념의 유치원을 만들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개념의 유치원을 만들 것인지를 놓고 다시 검토에 들어갔다.

검토 결과 핵가족화와 맞벌이 시대에 육아에 대한 경험이 많지 않은 ‘신세대 엄마’들에게 도움이 되는 새로운 기능과 시설을 갖춘 유치원으로 만들자는 결론이 나왔다. 최종 결론까지 무려 7개월이 걸렸다.

이렇게 오랜 기간에 걸쳐 정밀하고 면밀한 연구를 거쳐 건립된 무사시노시 시립 유치원은 비록 50명가량을 수용하는 작은 규모이기는 하지만 현재 일본에서 훌륭한 유치원의 모델로 인식되고 있다. 이 유치원의 건물과 운영 방식을 견학하려는 방문객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고 있다.

무사시노시 관계자는 “시의 예산이 드는 사업인 만큼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철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었다”고 강조했다.지명훈기자 mhj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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