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시욱칼럼]´藥價압력´ 국회서 밝혀라

  • 입력 2002년 7월 24일 18시 51분


다국적 제약회사의 로비 때문에 장관직에서 해임되었다는 이태복 전 보건복지부장관의 폭탄선언은 국민에게 큰 충격이었다. 이 사건은 국가의 대외관계와 자주성에 관련되는 몇 가지 근본적인 문제들을 제기한다.

첫째는 그런 로비와 압력이 과연 있었는가, 그리고 실제로 장관이 이로 인해 경질되었는가 하는 사실의 문제다. 둘째는 우리에게 바람직한 한미 우호관계는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다. 셋째는 때마침 불거진 중국산 마늘 수입자유화 문제에서도 나타났듯, 강대국들 틈에 끼여 있는 작은 나라 한국이 생존과 국가이익을 위해 이들 열강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다.

▼로비탓 장관경질 사실인가▼

이번 사건과 관련해 다국적 제약회사가 로비를 벌인 것은 불법행위가 개재되지 않는 한 큰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여기에 관여해 통상적인 외교활동 이상의 행동을 했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직접 보건복지부에 여러 차례 압력을 가하고, 또한 장관 경질을 위해 그 윗선에 작용한 경우 분명 내정간섭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각료가 미국의 압력으로 해임되었다는 부끄러운 이야기는 과거에도 전혀 없지는 않았다. 노태우 정권 당시인 1990년 12월에 있은 개각에서 재임 9개월의 박모 상공부장관이 경질되었다. 개각 직후 상공부의 통상담당 제1차관보와 대미통상 실무국장인 통상협력관에 이르는 통상업무 라인도 전원 갈리자 경제부처 주변에서는 “대미 통상마찰의 희생양이 됐다”는 풀이가 지배적이었다. 미국 측은 당시 우리 국내에서 일어난 과소비억제 운동에 대해 박 장관을 겨냥해 “과소비 억제를 수입 규제로 유도하고 있다”고 여러 차례 비난했다. 심지어는 “박 장관 휘하의 통상 담당자들과는 대화가 잘 안 된다”고 불만까지 표시했다고 언론 매체들은 전했다. 그러나 이때 박 장관 경질의 배경에 관한 그 같은 보도들은 어디까지나 추측 보도에 불과했을 뿐 이번처럼 당사자가 직접 폭로한 것은 아니었다.

강대국이 약소국의 내정에 간섭한 대표적인 예는 구소련과 위성국들의 경우지만 이와는 약간 다른 예가 이른바 ‘핀란드화’(Finlandization)의 당사국인 핀란드다. 핀란드는 공산국가가 아니면서도 국내 정치에 미치는 구소련의 영향력이 워낙 커서 대통령후보가 소련의 압력으로 사퇴한 예가 있으며 소련을 반대하는 인사는 각료에 임명되지 못했다. 언론 역시 소련의 눈치 보기에 바빠 ‘핀란드식 침묵의 법칙’을 준수했다. 소련의 체코 침공 같은 큰 사건을 축소 보도하고,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명작인 ‘수용소 군도’를 번역하지 못해 스웨덴의 번역판을 수입했다. 소련 붕괴 후 핀란드가 유럽연합에 가입신청을 낸 다음에도 러시아는 계속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94년 2월 유리 데리야빈 헬싱키 주재 러시아 대사가 핀란드 외무부에 내정간섭적인 비밀서한을 보냈다. “반러시아 세력들이 준동하고 있으니 집안단속을 잘 하라”는 요지의 협박성 경고여서 핀란드 국민의 격분을 샀다.

핀란드가 자존심을 접으면서 구소련과 잘 지낸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핀란드는 주권과 영토, 그리고 민주주의와 국제적 중립을 보존하기 위해 강대국인 소련에 대해 ‘핀란드식 현실주의’를 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동서 냉전시대가 끝나면서 핀란드의 국제적 위상도 달라졌다. 서유럽의 일원이 되고 노키아 휴대전화를 비롯한 첨단제품으로 세계시장을 석권함으로써 ‘핀란드화’ 과정을 졸업하고 ‘노키아화’(Nokianization)에 들어갔다는 것이 국제적 평가다.

▼反美감정 촉발 막아야▼

이 전 장관 사건은 최근 미군 장갑차에 우리 여학생 2명이 치여 숨진 사건 등 여러 악재들로 한미관계가 꼬이고 있는 시기에 터져나와 사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현재 미국 조지 W 부시 정권의 대외정책은 중동문제에서 드러난 일방주의적 성격 때문에 국내외 비판자들로부터 ‘제국주의’ 노선이라는 비난까지 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 정부가 자국 기업의 이익 옹호를 위해 우리 보건복지부의 건강보험 재정적자 해소책의 하나인 약값 인하방침을 막으려 했다니 한미우호를 위해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행동으로 반미 감정을 촉발해서는 안 될 것이다.

김대중 정부 역시 대미 관계에서 계속 파열음을 낸 책임이 있다. 청와대는 이 전 장관의 주장을 전면 부인하고 있지만 우선 그런 폭로가 나왔다는 사실 그 자체가 나라와 정부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국민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다. 어느 쪽 말이 맞는지 국회의 철저한 조사가 있어야 한다.

남시욱 언론인·성균관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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