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박영균/회계조작

  • 입력 2002년 7월 10일 18시 36분


세계 최고의 갑부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은 1999년 여름 개인재산 50억달러를 교육과 의료발전에 써달라고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개인이 낸 액수로는 그때까지 최고 액수였다. 미국에선 문화재단이나 장학재단을 직접 만들기보다는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경우가 많다. 뭘 믿고 이렇게 엄청난 거액을 선뜻 내놓을 수 있는 것일까. 바로 믿을 수 있는 회계사들이 있기 때문이다. 기부한 돈이 어떻게 쓰였는지를 회계사들이 꼼꼼하게 평가해서 정기적으로 그 내용을 보내오는 것이다.

▷주식이나 채권에 투자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투자자가 기업 경영자에게 맡긴 자금이 어떻게 쓰였고 현재 얼마나 이익이 났는지를 회계보고서는 그대로 보여준다. 투자자들이 안심하고 투자할 수 있는 것은 투명하고 믿을 수 있는 회계보고서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계제도는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기둥이자 파수꾼이라고 불린다. 그런데 간혹 손익계산서와 같은 회계보고가 사실과 다른 경우가 있다. 말하자면 회계보고서가 조작되는 것인데 이를 분식(粉飾)회계라 한다.

▷1997년 외환위기 때 한국 기업들은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의심을 받았다. 얼마 전까지 신용 A등급을 받았던 기업들이 갑자기 부도를 내고 잇달아 쓰러졌던 것이다. 당시 파산했던 대우 기아 등 재벌그룹들이 적게는 수천억원에서 많게는 수십조원까지 분식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기업의 투명성은 국제적인 웃음거리가 될 정도로 수모를 당했다. 분식회계에 연루됐던 회계법인들은 대부분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고 회계법인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소송이 줄을 이었다.

▷미국 전체를 뒤흔들고 있는 회계부정 스캔들은 외환위기 무렵의 한국을 보는 것 같다. 엔론을 비롯해 월드컴 제록스 GE 비벤디 머크 등 굵직한 기업의 회계부정사건이 잇달아 터지면서 자본은 해외로 빠져나가고 미국 주가는 연일 폭락하고 있다. 미국 언론들은 ‘미국 자본주의시스템의 최대 위기’라고 쓰고 있다. 부정규모도 수십억달러에서 100억달러대에 이른다. 마침내 조지 W 부시 미국대통령은 불법행위를 저지른 경영인들을 엄단하겠다고 밝혔다. 경영인도 문제이지만 부정을 밝혀내야 할 회계사나 감독기관마저 의심을 받고 있으니 말이 아니다. 하기야 부시대통령조차 회계부정 스캔들이 터진 기업의 주식을 소유했다가 매각하면서 뒤늦게 신고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으니 누굴 믿어야 할까. 회계조작이 가져온 가공할 결과는 신뢰상실이었다.

박영균 논설위원 parky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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