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철칼럼]또 ‘햇볕 그림자’ 드리울건가

  • 입력 2002년 7월 3일 19시 04분


햇볕정책 바람에 주적(主敵)개념이 흐릿해지면서 휴전선을 지키는 군인들에겐 고민거리가 새로 생겼을 것이란 이야기가 돌았다. 북한군이 침범했는데 총을 쏘아야 하는지를 일일이 상급 지휘관에게 물어서 사격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다. 촌각을 다투는 극한상황에서 국토방위란 본연의 근무수칙을 가로막는 것이 있다는 말인데 도대체 그것은 무엇이고, 누구를 위한 것인가. 북한군의 6·29 서해도발 사태는 이런 기막힌 이야기가 그대로 현실로 나타난 실례다. 더욱이 교전현장 부근의 우리 초계함은 함포사격도 못하고 우리 고속정을 침몰시키고 도망가는 북한 경비정을 보고 있어야만 했다.

▼제재방법 왜 없단 말인가▼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자랑스럽고 풋풋한 젊은이 24명이 숨지거나 부상했다는 사실이다. 이 순간 햇볕정책이란 말이 이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다. 월드컵축구 선전에 환호했던 “대∼한민국”이란 열창도 순간 힘이 빠지고 만다. 남북간의 화해와 교류를 추진하면서 평화공존을 추구한다는 햇볕정책이 우리 군엔 손발을 묶고 판단을 흐리게 하는 주술(呪術)이 되고 북한군엔 기습공격의 빌미를 준다면 이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이쯤 되면 국가안보니, 철통국방이니 할 것도 없다.

이번 사태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대목이 있다. 지금 잔뜩 긴장하고 있는 것은 북측이란 점이다. 장병을 살상하고 함정을 격침시켰으니 남측이 얼마나 강력한 조치를 취할 것인지, 대화분위기가 가까스로 일었던 미국은 다시 강경 선회, 회담특사 파견 철회 의사를 밝혔고 일본은 또 무슨 이야기를 해 올 것인지 북측은 한창 초조할 때다. 실제로 북측이 남측에 보낸 월드컵 축하메시지는 유화 제스처 속에 감춰진 그들의 불안한 심리를 읽게 한다.

그런데 막상 우리가 보여준 것은 무엇인가. 서둘러 금강산관광 등 민간교류는 계속한다고 밝혔고 해상 교전수칙을 강화한다는 수준이었다. 북측의 사과, 책임자 처벌 및 재발방지책을 요구했지만 과연 북측이 응해 오리라고 생각했다면 그야말로 난센스다. 일본 방문 중 김대중 대통령은 서해사태에 ‘냉정히’ 대응하겠다고 했으나 무슨 내용인지 헷갈렸고 귀국성명에서도 앞으로의 대화자세를 강조했다. 결국 사태 전과 무엇이 달라진 게 있는가. 게다가 사태발생 후에도 현 집권세력이 틈만 나면 햇볕정책을 싸고도는 것을 보면 더 이상 기대할 것도 없어 보인다. 한마디로 시간이 흐르면서 흐지부지될 것 같다는 말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이런 우리를 북측은 어떻게 보겠느냐는 점이다. 두려워할까. 아니다.

국가적으로 새로운 문제가 제기됐을 때 기민하게 대응하는 것이 정부의 기본임무다. 특히 젊은 목숨이 희생된 이번 사태처럼 국민적 공분이 일어날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도 정부는 북측의 명백한 도발에 아무런 제재도 못하고 있다. 전쟁이 아니라 제재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제재조치가 왜 없단 말인가. 확전이 두려워 제재도 못한다면 북측은 오히려 우리를 깔볼 수 있다. 그것은 앞으로 각종 남북협상에서 우리 입장이 어려워질 것이란 뜻도 된다. 이유는 분명하다. 기본적으로 북측 눈치를 보고 채찍 대신 당근이나 주려는 햇볕정책의 허점을 북측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엄연히 잘못을 저질렀어도 아무런 불이익 제재가 없을 때 앞날의 경고는 엄포가 되기 쉽다. 자국민이 당했는데도 아무런 제재도 못한다면 그런 나라가 어디 있는가. 국민은, 또 장병은 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가. 햇볕정책을 포기하라고 말하지 않겠다. 언제 국민과 한번 논의라도 하고 시작한 햇볕정책이 아니지 않은가.

▼재발 가능성 상존▼

이번 서해도발에 내재된 가장 위험한 요소는 재발가능성이다. 서해 북방한계선(NLL) 주변은 충돌가능성이 상존해 있는 곳이다. 게다가 북한 군부의 충성심을 가장한 저돌적 행동을 이번 사태의 원인으로 꼽는 풀이도 주목해야 한다. 강성대국을 외치지만 김정일 체제는 안보 경제면에서 어려움에 처해 있다고 북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미국과의 갈등이 계속됨으로써 안보상황은 개선될 여지가 좁아지고 있으며 고질적 식량난에 외부 원조도 줄어들어 경제상황이 악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군부를 포함한 200만명의 북한 엘리트층에는 그동안 쌀을 배급해 왔으나 외부지원 쌀이 2000년 90만t에서 2001년엔 1만t으로 격감함으로써 이들 엘리트의 불평이 누적되고 있다는 관측도 있다. 결국 어떤 불만이 언제 또 휴전선을 따라 터질지 모른다는 의미다. 그때도 여전히 ‘햇볕’의 그림자를 드리울 것인가. 문득 어린 시절 6·25 피란 후에 읽었던 모윤숙 여사의 장편시가 생각난다.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일독(一讀)을 권한다.

최규철 논설주간 ki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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