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원효로 풀어낸 나는 누구인가 '일심의 철학'

  • 입력 2002년 6월 28일 18시 10분


◇ 일심의 철학 / 한자경 지음 / 415쪽 1만7000원 서광사

흔히 서양철학의 역사는 반동의 역사인 반면 동양철학의 역사는 훈고의 역사라고 평한다. 서양의 철학자들은 과거의 철학을 비판하며 자신의 조망을 자유롭게 토로한다. 칸트는 데카르트를, 헤겔은 칸트를, 마르크스는 헤겔을 밟는다. 그러나 동양에서 철학자의 역할은 과거에 이미 완성됐던 성현의 가르침을 충실히 이해하는 것이었다.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에 대한 이런 상반된 연구태도는 현대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현대의 서양철학 연구자는 과거 자신들의 선배들이 그랬듯이, 인간과 세계에 대한 조망을 자유롭게 토로하며 새로운 철학을 구성해 낸다. 그러나 동양철학 연구자는 이를 금기시했다. 철학자 한자경(이화여대 교수)은 이런 금기를 깨뜨린다. 독송과 주석의 대상이었던 불교의 가르침을 과감하게 풀어낸 후, 마치 서양철학자들이 그랬듯이 자신의 철학을 개진한다.

마치 선승의 화두처럼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며 자아에 대한 탐구를 시작한 저자는 치밀한 논리적 분석의 끝에서 원효의 일심(一心)과 만난다. 일심은 공(空)과 자유를 자각한 마음이며 무한의 마음이고 절대의 마음으로 우리의 일상적 마음의 근저에서 작용하는 본래적 마음이다.

저자는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 칸트의 초월적 자아, 유가의 태극을 불교의 일심과 동치시킨다. 독일의 프라이부르크대에서 칸트를, 다시 동국대에서 불교 유식학(唯識學)을 전공한 저자의 능숙한 비교철학적 논증들은 하나하나 강한 설득력을 갖는다. 그리고 이렇게 동서양 형이상학의 공통분모로 추출된 초월적 자아의 철학, 일심의 철학은 물리주의적 사회과학적 인간관의 전횡으로 인해 피폐해진 현대인의 존엄성 회복을 위한 지침으로 제시된다.

많은 사람들이 인문학의 위기, 철학의 위기를 말한다. 이런 위기는, 인간의 사유와 행동이 모두 자연법칙과 사회법칙으로 설명 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형이상학적 자아를 부정해 온 현대 철학자들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고 저자는 비판한다.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초월적 주체에 대한 탐구를 시작할 때 비로소 인문학은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과 차별되는 독립된 학문으로 존립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초월적 주체가 바로 일심인 것이다. 저자는 동서양 철학을 아우르며 창출해 낸 일심의 철학을 위기에 처한 오늘의 인문학을 소생시키기 위한 새로운 비전으로 제시한다.

이런 일심의 철학에 토대를 두고 저자는 물리주의적 인간관을 비판하고 동서양 철학의 융합을 모색하고 언어의 정체를 탐구하며 남녀간 사랑의 의미를 재해석하고 한국철학이 가야할 길을 제시한다. 아울러 저자는 일심의 형이상학을 가르치는 불교 유식학의 교리와 수행체계를 서양철학적 언어를 곁들이며 세밀하게 풀어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도처에서 수많은 물음표와 만나게 된다. 이 책이 난해한 형이상학적 주제를 다루면서도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전편을 일관하는 저자의 진지한 문제의식 때문일 것이다. 저자가 제공하는 치밀한 논리적 분석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일상적 자아, 세속적 자아로부터 어느새 멀리 벗어나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김 성 철 동국대 교수·불교학 madhyama@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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