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신석호/드러나는 ´월가의 위선´

  • 입력 2002년 6월 27일 18시 40분


지난해 9·11테러 직후 오르기 시작한 미국 S&P 500지수는 올 3월18일 정점을 맞았다. 당시 지수는 1,165.55였고 시가총액은 10조6665억달러였다. 26일 S&P 500지수는 973.53으로, 시가총액은 8조9409억달러로 떨어졌다.

1조7256억달러가 공중으로 날아간 원인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라진 부(富)의 상당 부분이 엔론 사태로 시작된 기업 회계 불투명성에 따른 ‘리스크 프리미엄’인 것만은 분명하다. 신뢰의 붕괴가 가져온 경제적 비용인 것이다. 쉽게 말하면 3월18일의 주가가 정상적인 제값이라면 나중에 투자자들이 ‘속을 위험’까지 고려해 할인한 가격이 지금의 주가라는 뜻. 외국인투자자들이 한국 증시를 높이 평가하지 않아온 것도 마찬가지 논리다.

내로라하는 미국의 대표 기업들이 회계를 조작하는 마당에 어느 기업을 믿겠느냐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어 문제는 심각하다. 미국 기업에 대한 신뢰의 붕괴로 한국 거래소시장에서도 26일 하루 만에 21조6033억원이 허공에 날아갔다.

신뢰의 붕괴는 그나마 점잖은 표현이다. 최근의 위기는 가려졌던 월가의 위선이 폭로되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다.

미국은 그동안 “미국식 경제 투명성이야말로 신(新)자유주의적 세계화 시대를 맞아 살아남고 싶은 나라들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운영체제”라고 강조했고, 때로는 강요했다.

한국도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영역에 걸친 비리사건들을 통해 신뢰를 잃기는 쉽지만 되찾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배웠다. 대우그룹 분식회계 사건은 온 경제계를 뒤흔들어 놓기도 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은 저서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에서 “덤불 속에서 무언가 움직였다는 이유만으로 누(아프리카 초원의 소과 동물) 떼(외국인 투자자)가 (증시에서) 도망치게 하지 않으려면 덤불(불투명성)을 베어 버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망신스러운 표정으로 덤불 자르기에 나선 미국을 보며 경각심을 가져야 할 때다.

신석호기자 경제부 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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