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수의 축구이야기]거친 파도앞에 우린 하나였다

  • 입력 2002년 6월 15일 02시 01분


텅 빈 인천문학월드컵경기장. 녹색의 그라운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늑하게 쉬고 있다. 스탠드의 열정도 서서히 식고 있다. 나는 지금 텅 빈 스탠드에 앉아 숨을 고르는 중이다. 유럽전지훈련의 순조로운 항해로 시작하여 희망의 예광탄이 된 세 차례의 평가전, 그리고 48년 만의 첫 승과 지금 이 순간, 믿지 못할 16강 신화를 단 한차례도 놓치지 않고 숨가쁘게 쫓아온 내 젊음의 아드레날린도 조금씩 잦아들고 있다. 나는 지금 내 육체의 기이한 온도에 오히려 놀라는 중이다. 이렇게 고요할 수가. 내 심장은 경기 종료 휘슬과 더불어 멎어버린 듯, 가만히 손을 얹지 않으면 그 미세한 리듬을 느낄 수조차 없다. 미국과의 아쉬운 무승부를 지켜보면서 나는 ‘유보해야만 하는 사랑은 뼈아프다’고 썼다.

이제 그 사랑이 완성되었다. 그들은 그라운드를 지배했고 나는 마지막 사랑의 열병을 앓았다. 사랑의 행위를 힘껏 마친 연인들의 아늑하고 나른한 상태처럼 나는 지금 기이한 저온 현상을 겪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대륙의 자식들이다. 압록강, 두만강을 가랑이 사이에 끼고 천하를 굽어보았다. 그러나 식민지와 전쟁, 가난과 독재로 우리는 간신히 서푼짜리 자존심으로 여기까지 버티며 약소국 아닌 약소국, 섬나라 아닌 섬나라가 되어 그만 대륙의 기개를 잃고 말았다. 만약 이 순간이 영원히 기억될 수 있다면 지금 우리는 이 순간만큼은 대륙성을 회복했노라고 선언할 수 있다.

우리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16강에 이르는 거친 항해 동안 우리는 무수한 비판과 토론을 겪었으며 시행착오와 야심에 찬 결단을 해냈다. 비난과 야유도 없지 않았지만 축구였기에 그 모든 열정적 토론은 하나의 힘으로 응집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 이러한 체험은 매우 소중한 것이다. 생산적 토론과 응집된 공동체의 열망으로 우리는 ‘4열 종대 헤쳐 모여’식의 권위주의적 동원령을 뿌리치고 자발적으로 광장에 모였다. 그곳에서 우리는 기꺼이 ‘붉은 악마’가 되었다. 필요 이상으로 경직되었던 우리의 강퍅한 마음을 풀어냈으며 쓸데없이 신경질이나 부리던 이 사회의 동맥경화증을 적어도 지난 보름동안 말끔히 씻어냈다.

그렇게 우리는 세계와 만났다. 여전히 가난과 전쟁, 대립과 폭력이 우세한 이 지구라는 작은 행성에 세계인과 더불어 며칠 동안 우리는 평화와 우애의 잔치를 벌였다. 16강 신화로 우리는 잔치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으며 이 한마당은 인종, 이념, 종교, 문화의 차이를 한 데 묶어 ‘다양성으로 공존하는 인류공동체’를 연습했다. 그 연습은 훌륭히 치러졌으며 이제 남은 보름, 우리는 인류와 더불어 진정한 공동체의 꿈을 아름답게 꿀 것이다. 16강 이후, 마치 황사가 걷힌 듯, 우리는 푸른 광장에서 희망의 열병을 앓게 될 것이다.

정윤수 축구칼럼니스트 pragu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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