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反철학' 한국의 이해 '라깡의 재탄생'

  • 입력 2002년 6월 14일 17시 27분


라깡의 재탄생/김상환 홍준기 엮음/715쪽 3만5000원 창작과비평사

이 책의 엮은이인 두 사람은 철학자들이다. 스스로를 반(反)철학자로 자처했던 프랑스 출신의 자끄 라깡은 철학자를 과학자를 흉내내는 자이자 ‘궁정의 광인’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그는 또 궁정에서는 광인만이 제대로 된 얘기를 한다고 하면서 철학자가 과학에 다리를 놓아주는 존재임을 인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라깡의 재탄생’이라는 책 제목이 시사해 주듯이 엮은이들은 라깡의 일정한 자기화를 시도한다. 이는 좋은 일이다. 질 들뢰즈의 뒤를 이을 또 다른 유행상품을 만들어내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발견을 위한 노동의 시도이기 때문이다. 저자들이 그런 시도를 위해 선택한 통로는 영향사 연구와 비교 연구이다.

그러나 라깡 이론의 짜임새 자체를 제공해 준 헤겔과 하이데거에 대한 연구가 누락된 것은 이 책의 약점이다. 또 라깡이 결정적으로 대결하려 한 칸트에 대한 연구도 빠져 있다. 이 사실은 라깡의 이론이 독일철학의 도움을 받았지만, 한국의 독일철학 전공자들은 라깡을 읽지 않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한국에서 라깡 연구는 제한돼 있다.

엮은이들은 “결코 만만치 않은 연구성과들을 내놓은 국내 필진의 역량에 놀라움을 표시”한다고 하였지만, 과연 그럴까? 예외적이지만 수록된 논문들 중에는 ‘세미나’ 11집 같은 라깡의 일부 저서에만 너무 의존하는 글도 있고, 슬라보예 지젝의 해석을 지나치게 받아들이는 글도 있다. 또 비록 라깡 자신의 불명확성 탓이긴 하지만 ‘매우 드물게’ 잘못된 이해도 보인다.

라깡이 고전적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고 평가한다면 그의 ‘고전적’ 주저가 무엇인지는 아직 문젯거리다. ‘에크리’는 충분히 논증적이지 못하고, ‘세미나’는 논증을 담고 있지만 너무 자유롭고 시험적이다. 게다가 총 26권의 ‘세미나’는 아직 그 절반도 출판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라깡의 ‘재탄생’을 말하기에는 너무 이른 것이 아닐까? 게다가 이미 출판된 라깡의 저술들마저도 충분히 참고되지 못했다면?

라깡은 평생 엄밀한 과학에 가 닿을 수 있기를 열망해 왔다. 하지만 과학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는 홍준기 씨의 글 ‘자끄 라깡, 프로이트로의 복귀’와 김상환 씨의 글 ‘라깡과 데까르뜨’에서는 과학의 개념 자체가 잘못 제시돼 있다. 이들은 영미계나 하이데거류의 과학 개념에 입각하여 과학을 실증과학 또는 경험과학과 동일시한다. 그러나 라깡은 과학이 결코 경험적일 수 없음을, 경험과학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음을 그의 동료인 알렉상드르 코이레의 글을 통해 매우 잘 알고 있었다. 또 김상환 씨는 ‘라깡과 데리다’에서 1960년대 초반 이후 라깡이 과학과 거리를 둔다고 했지만, 라깡은 1973년의 ‘세미나’ 20집에서도, 1975년 미국에서 강연을 할 때도 과학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명확히 표현한다.

라깡이 “실재하는 것은 합리적이다”라고 말한 헤겔을 통해 받아들인 것은 실재의 논리성이다. 그리고 이런 실재의 논리성을 파악하려는 노력은 수학적 기호화를 거쳐, 라깡의 후계자인 자끄-알랭 밀레의 ‘논리과학’으로까지 이어진다. 홍준기 씨는 정신분석이 인간을 개별자로 간주한다고 했지만, 이는 한 측면만 강조한 것이다. 라깡의 정신분석은 개별성 밑에 깔려 있는 보편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분석할 때 ‘분석된 것’은 언어화될 수 있고 공유될 수 있는 것이다. 헤겔을 누락시킨 이 책은 일정한 편향성을 갖는다.

‘라깡과 데까르뜨’에서 김상환 씨는, 라깡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에서 의식적인 ‘생각’과 무의식적인 ‘존재’를 서로 모순적인 것으로 대립시키고 있음을 잘 드러낸다. 무의식적 진실을 부인하는 의식적인 생각은 자신의 존재에 충실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존재에 대해 거짓된 것이다. 이때 의식적 ‘생각’을 ‘거짓말’로 만들어버리는 존재는 일정하게 하이데거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존재를 지키려는 데서 라깡의 윤리학이 성립한다. ‘욕망을 양보하지 말라’는 라깡의 윤리학적 명제는 자신의 존재를 용기를 갖고 지키라는 것이다.

하지만 민승기 씨는 ‘라깡과 레비나스’에서 오히려 윤리학을 ‘타자와의 관계’로 규정하면서, 라깡과의 접점을 찾지 못한다. 차라리 ‘라깡의 재탄생’이란 제목의 책에서 진지하게 제기되었어야 할 문제는 욕망을 양보하지 않는 것이 진정으로 윤리적인지, 욕망을 양보하지 않도록 허용해주는 사회형태는 어떤 것인지의 문제였을 것이다.

수록된 논문들 가운데 맹정현 씨의 ‘라깡과 싸드’와 이만우 씨의 ‘라깡과 클라인’에서는 김상환 홍준기씨의 과학 개념과 다른, 보다 라깡적인 과학 개념이 제시된다. 이만우 씨의 글은 영미계의 과학개념과 맞서 싸우면서도 그것에 여전히 근거한다는 한계를 갖지만, 이데올로기에 대해 과학을 방어한다는 점에서 생산적이다. 그러나 이만우 씨는 라깡이 과학의 토대를 게임이론 식의 ‘추론과학’에서 찾는다고 하는데, 라깡은 그 직후 정밀과학과 추론과학의 대립을 부정한다.

한편 맹정현 씨의 ‘라깡과 싸드’는 간명하면서도 명쾌하여, 라깡 이론에 대한 뛰어난 입문적인 글로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의 다른 글 ‘라깡과 푸꼬·보드리야르’도 매우 짜임새가 있으며 실천적으로도 유의미하다. 하지만 거리를 취할 수 있는 독자라면 오히려 정리가 대단히 잘 되어 있는 맹정현 씨의 ‘라깡과 싸드’에서 향유와 욕망에 초점을 맞추는 라깡의 한계를 엿볼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서평자와 과학에 대한 관점을 달리 하지만, 김상환 씨와 홍준기 씨의 글들은 가르쳐주는 것이 많은 매우 좋은 글들이다. 특히 라깡과 데리다의 입장을 번갈아 가면서 소개하는 방식을 택한 김상환 씨의 ‘라깡과 데리다’에서는 필자의 지적 고뇌가 엿보인다. 신명아 씨가 소개하는 버틀러의 라깡 비판은 필자 자신의 유보적 입장 표명에도 불구하고 흥미롭다. 서동욱 씨의 ‘라깡과 들뢰즈’를 통해서는 라깡주의와 들뢰즈적으로 재해석된 스피노자주의 사이의 대립구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과학적 인식(제3종 인식)의 힘을 사랑했던 스피노자는 들뢰즈적 스피노자주의를 명백히 거부할 것이다.

국내학자 12명의 글 16편을 모아 엮은 이 책을 보고서 ‘한국의 연구자들이 이 정도 해냈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자기비하다. 어느 나라에서건 모든 연구는 엄밀하고 정확해야 한다. ‘라깡의 재탄생’은 라깡이 올바로 말한 것과 잘못 말한 것을 가려내고 그의 개념들의 궤적이 완전히 정리된 이후에야 가능할 것이다.

이종영 계간 ‘진보평론’ 편집위원·사회학박사

silenos@hana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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