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백기완/옹헤야, 남북 공차기

  • 입력 2002년 6월 8일 23시 03분


며칠 전 한국과 폴란드의 공차기에서 황선홍과 유상철이 거푸 골 넣는 것을 본 나는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아리 아리” 소리를 질렀다. 없는 길은 자꾸 뚫어라, 그러면 열린다 이 말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내 눈자위에 손수건을 갖다대 보아하니 아내라, 우리들은 마치 젊은 연인처럼 껴안고 울었으니 왜 그랬을까. 나는 ‘공차기란 맺힌 한을 내지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분단을 넘어 화해로▼

내 어릴 적 얘기다. 공차기 선수가 되고자 서울엘 왔으나 중학 진학을 못해 선수가 되는 길이 막히자, 나는 길거리의 돌멩이 깡통 따위를 보이는 대로 차곤 했다. 그 통에 엄지발톱이 빠지는 아픔으로 어렴풋이 깨우쳐 갔다.

돌멩이만 차서야 되겠는가, 돈이 없으면 재주를 살릴 수가 없는 이 잘못된 세상을 내질러야지. 그런 마음이 곧 내 재야 인생인지라. 나는 공차기만 보면 미쳐서 내 맺힌 한을 내지르곤 하는데, 그날 우리 선수들이 공을 넣자 한꺼번에 터져나오던 아, 그 아우성.

나는 거기서 우리 7000만 민족이 한을 푸는 것을 느껴 이렇게 외쳐댔다. 응원하는 사람들이 “파이팅”, 그러면 나는 “아리 아리”. 다른 사람들이 “대한민국”, 그러면 나는 “우리 우리 7000만”. 처음 듣는 응원가가 나오면 나는 “옹헤야”, 그러면서 새벽 3시까지 울고 또 울며 생각했다.

이 잔치가 우리 7000만의 잔치로 열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리되었으면 으뜸은 물론 승부의 노예가 되어 있는 오늘의 공차기 문화, 돈벌이에 매인 공차기 문화를 극복해 한판으로 어우러지는 세계 공차기 문화를 새롭게 만들 수가 있었을 게 아닌가.

그러던 참에 9월에 남북 공차기가 한판 벌어진다니 맑은 냇물에 온몸으로 풍덩실 뛰어드는 느낌이다.

옛날 경평(京平) 공차기가 열릴 적이다. 시골구석에서도 어른들은 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우리 꼬마들은 냇가 모래밭에서 새끼로 마른 공을 찼다. 누가 이기고 지는 것이 아니다. 그냥 죽어라 하고 원통함을 내지르다가 땀이 범벅이 되면 맑은 냇물에 풍덩실. 느지막해서 왜놈 순사네 집 앞을 지나며 더욱 목청을 높이던 생각이 난다.

“경평은 좋겠네, 경평은 좋겠네. 이쪽 저쪽 한 알씩 넣어서 경평은 좋겠네.”

그리되면 한 집 두 집 꺼졌던 불이 켜지던 아, 일제가 강요하던 그 캄캄한 밤. 그 캄캄한 밤이 오늘은 분단으로 이어져 더더욱 아득한데 남북의 공차기가 열린다고 한다. 누가 이를 마다할 것인가.

하지만 내 생각이다. 이참에야말로 남북의 대표선수들끼리만 어울리질 말고 나처럼 공차기가 그렇게도 애탔으되 공 한번 못 차보고 늙은 원통치들의 남북 공차기도 함께 열릴 수는 없을까.

부질없는 생각이다. 이미 두 무릎이 꺾였는데 공을 준들 찰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아직은 남북 공차기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어쨌든지 남북 공차기는 열어야 할 까닭이 있다.

우선 이참에 공차기 세계 큰잔치에서 우리 겨레가 으뜸을 해야 한다. 그리하여 7000만의 이름으로 남북 공차기를 열어 첫째, 한반도에 강요되는 전쟁의 먹구름을 내질러야 한다.

둘째, 입때껏 민족의 역량을 쓸데없이 축내오던 우리끼리 다투기를 청산할 때박(계기)을 잡아야 한다.

셋째, 입때껏 자주통일의 물질적 기초를 파괴해온 반역행위를 청산할 때박을 만들고자 해서라도 남북 공차기는 큰 몫을 하리라고 보는데 참말로 열릴 수가 있을까.

이 글을 쓰고 있는데 나를 아는 한 젊은이로부터 전화가 왔다.

“선생님, 이제 미국도 우리가 이겨 16강, 8강을 넘어 끝내 으뜸을 할 것이 틀림없는데 선생님께서 통돼지 한 놈 잡는 거지요.” “암, 잡고말고.” 그렇게 말을 해놓고서는 나는 고개를 들었다.

우리들은 본디가 잔치의 겨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을 다 잊고 사는 것은 아닌가.

▼가슴에 맺힌 恨 내지르자▼

그렇다 이참에 7월 백중 달 밝은 밤, 우리 7000만이 모두 물에 잠긴 달을 건지려 뛰어드는 달거지를 하자. 거기서 달을 잡노라면 백년의 흉측한 허물은 말끔히 벗겨질 것이고 그 도막에 안줏감으로 어찌 한 마리뿐이랴.

백운대에서 광화문에 이르는 길 양옆에 돼지 수천마리를 매달아 놓고 밑두리에 불을 댕기면 뜨거워 “꽥-꽥”. 잘 익은 안주에 잘 익은 술을 빚어 놓고 한판 공차기를 벌이자 이 말이다.

우리 겨레의 가슴에 맺히고 온 인류의 가슴에 맺힌 한을 내지르는 진짜 공차기.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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