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모종린/후원금인가 로비자금인가

  • 입력 2002년 5월 23일 18시 40분


올해 들어 연이어 터지고 있는 정치자금 사건이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사건의 유형이 다양해지고 복잡해졌다는 것이다. 합법적인 행동이 비난의 대상이 되고 반면 불법행위가 동정을 받고 있다. 그러고 보면 과거의 정치자금 비리문제는 단순했다고 할 수 있다. 정치인들이 거액의 자금을 불법적인 방법으로 받았는지, 그리고 거기에 대가성이 있었는지만 따지면 됐다.

▼政資法 정치인 개입 심해▼

정치자금과 관련해 국민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사건 중의 하나가 최근 불거진 타이거풀스 인터내셔널(TPI)의 정치인 로비 의혹이다. 체육복표 사업자로 선정된 TPI가 지난 2년 동안 20여명의 국회의원과 여야 중앙당에 1억2000여만원을 기부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대다수 국민이 의아해하는 이유는 관련 정치인들이 자신들이 받은 돈이 합법적인 후원금이었기 때문에 문제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 문제를 떠나 관련자들이 거대한 이권사업에 관련된 회사로부터 적지 않은 돈을 받은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대부분 국민의 생각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행 정치자금법상 이들의 책임을 추궁할 수 있는 장치가 없다는 사실 또한 국민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한편 김근태 의원의 고백은 국민으로 하여금 정반대의 고민을 하게 만든다. 김 의원이 불법행위를 범했지만 동정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2000년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에서 불법자금을 사용한 것에 대해 검찰의 조사를 받게 되어 있는 김 의원이 정치생명을 위협받을 정도의 처벌을 받을 것으로 예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김 의원 처리에 관대한 여론이 형성된 이유 중의 하나는 김 의원의 개인이미지다. 상대적으로 깨끗하다는 평판을 갖고 있고 이번 사건도 본인의 고백을 통해 알려졌다는 사실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경선 비용에 대한 법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불법모금이 불가피했다는 현실론이 확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치자금제도가 이처럼 불안정하고 불합리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현재 상황에서 강조해야 할 요인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정치자금법 개정에 정치인들의 이익이 지나치게 개입되어온 사실이다. 다른 개혁과는 달리 정치자금을 포함한 정치개혁에서는 개혁 대상인 정치인이 개혁 주체의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정치인들에게 불리한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TPI 후원금 사건만 봐도 정치인 담합 문제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 TPI 후원금을 받은 대부분의 의원이 국회 문광위 소속인 것을 보면 소속 상임위원회가 관장하는 분야의 기업들이 국회의원들의 돈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회의원들이 자발적으로 직무 관련 후원금의 수수를 제한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리고 TPI 기부 내용을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도 정치인 담합의 결과다. 국민이 왜 합법적인 기부금 내용을 괴문서를 통해서 알아야 하는가. 선진국처럼 누구든지 인터넷으로 확인할 수 있는 수준으로 기부내용을 공개할 수는 없는 것인가. 문제는 현행 정치자금법이 정치인의 후원금 모금을 허용하고 있으나 기부자와 기부액수의 공개를 실질적으로 금지하는 데 있다. 정치자금 모금에 대한 규제를 완화해주는 대신 돈 흐름에 대한 투명성을 강화한다는 후원회제도 도입 취지에도 맞지 않는 이 규정을 개정하는 데 국회의원들은 적극 노력하지 않고 있다.

우리의 정치자금제도가 왜곡된 두 번째 이유는 정치자금에 대해 열린 토론이 이뤄지지 않는 데 있다. 김근태 의원의 경우를 보면 당내 후보자 경선비용을 고려해 선거나 경선이 있는 해에는 정치자금 모금한도를 현실화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는 현행 정치자금 모금 한도는 여전히 성역처럼 인식되고 있다. 지방선거 후보자에게 후원회를 허용하지 않는 것도 비현실적인 규제다.

▼기부자-금액 공개를▼

정치자금제도 개선에 있어 우리는 때로 상충되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 첫째, 현실에 맞게 제도를 정비해서 제도 미비로 발생하는 불법행위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둘째, 현실화된 제도 하에서 돈의 흐름을 투명하게 하고 정치자금 거래에 대한 정치인들의 책임을 강화하는 것이다. 최근 발생한 일련의 비리사건은 이러한 제도개혁이 얼마나 시급하고 이를 위해 이해당사자들의 사고 전환이 얼마나 필요한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모종린 연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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