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황호택/혈전(血栓)

  • 입력 2002년 5월 22일 18시 47분


김광웅(金光雄) 중앙인사위원장이 대학으로 돌아가면서 공무원 조직에서 생기는 연고주의의 폐해를 혈전에 비유하는 의미심장한 메타포(은유)를 썼다. 김 교수는 관계(官界)에 들어가기 전 신문에 짧은 글을 잘 썼다. 서울대 교수 중에는 신문에 짧은 글을 쓰는 사람들을 경시하는 분위기가 없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남이 써놓은 글을 품평하기는 쉽지만 실제로 200자 원고지 10장 정도에 명쾌한 논지로 감칠맛 나는 글을 담아 한정된 시간 안에 공급할 수 있는 교수도 많지 않다.

▷혈전은 우리말로 피떡이라고도 불린다. 피 속에 콜레스테롤(고지혈증)이나 포도당(당뇨병)이 많은 환자에게서 잘 생긴다. 혈액이 끈적끈적하게 엉겨 뇌 속의 모세혈관을 막아버리면 뇌출혈 또는 뇌경색이 일어나 목숨을 잃거나 신체 기능의 일부가 마비된다. 공직 인사에서 힘을 발휘하는 혈연 지연 학연을 혈액의 흐름을 막는 혈전에 비유한 것은 촌철살인의 적절한 비유이다. 혈전이 인체의 건강을 치명적으로 해치듯 관료 조직의 연고주의도 종국에는 정부의 건강에 심대한 손상을 입힌다. 김대중 정부의 건강에 적신호가 온 것은 권부 조직에 혈전이 너무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기업이든 관료사회이든 ‘형님 동생’ ‘선배 후배’들끼리 몰려다니는 조직은 건강하지 못하다. 지연과 학연으로 묶인 소수의 ‘하나회’만 별을 달면 ‘비하나회’들은 절망하게 되고 자각 증상이 나타날 겨를도 없이 조직 전체로 암세포가 번지게 된다. 유능한 경영자들은 조직 안에서 건강한 긴장을 유지하기 위해 혈연 학연 지연을 의도적으로 배제한다. 연으로 끈끈하게 얽힌 조직은 도덕적으로 해이해지거나 상호 검증의 부재로 인한 집단사고(Group Thinking) 의 오류에 빠져들기 쉽다. 공조직은 등산모임이나 친목계와 구분돼야 한다.

▷김 교수는 3년 임기를 다 채우고 물러가면서 “바로 혈전이 문제”라고 말했지만 “그동안 당신은 무얼 했소”라는 질문에는 무슨 답을 내놓을지 궁금하다. 혈관 속 피의 응고현상을 막기 위해 진료와 투약을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다. 중앙인사위는 정부의 인사 잘못에 대해 시정 경고하는 기능 대신에 면죄부를 주는 듯한 조사 결과를 발표해 비난을 받은 적도 있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수많은 위원회가 생겨났고 중앙인사위원회도 그 중의 하나이지만 그 조직의 존재 필요성을 국민 속에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하기는 어렵다.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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