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어버이날 아침에]김향숙/˝부모 노릇 힘드네˝

  • 입력 2002년 5월 7일 18시 38분


얼마 전 2000만원인가의 대학생 딸의 신용카드 빚을 갚아주기 위해 집 판 돈을 남긴 뒤 죽음을 택한 어느 아버지가 있었다. 방금 들은 것도 뒤돌아 서면 잊어버리는 내가 그 아버지를 기억하는 것은 그 아버지의 자살 소식을 들었던 당시 나 또한 아들의 카드 빚을 갚아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카드 빚 운운하는 기사나 방송을 들으면서도 우리 집 아이들과는 관계없는 일인 줄 알았는데 우리 아들 녀석에게도 카드 빚이 있었다니, 정말이지 충격이었다. 모범생으로 불리는 아들 녀석이나 녀석의 친구들까지 카드로 인해 어른들의 소비 수준을 흉내내게 된 세상이니, 카드 빚 때문에 몸을 파는 여자아이들이 넘쳐난다거나 또 살인까지 하게 된 일도 어쩌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지 모른다.

▼아이들 유혹하는 소비홍수▼

내가 카드 빚을 진 아들 때문에 충격을 받았듯이, 카드 빚 때문에 몸을 판 여자아이들 부모와 살인을 한 아들을 둔 부모들은 나와 비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문제를 일으키는 자식 뒤에는 언제나 문제 부모가 있다는 말이 있기도 하지만, 카드 빚으로 인한 문제는 단지 부모의 가르침이 부족해서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눈과 귀에 들어오는 것 모두가 소비를 통해 행복해질 수 있다는 환상과 유혹을 안겨주는 세상에서 아직 성숙하지 못한 10대의 젊은이들이 카드로 쉽게 자기 파괴의 길로 빠져드는 요즘, 한편으로는 온 나라가 대통령 아들이 연루된 비리로 시끄럽다. 되풀이되는 최고 권력자 주변의 비리는 아직도 이 사회가 봉건적 시스템에 의해 작동된다는 것의 상징이며, 우리 모두에게 수치심과 함께 큰 상처로 남을 것이다.

대통령의 아들 모두가 한결같이 의혹의 시선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걸 보면서, 특히 유학생 신분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막내아들을 보면서, 현명함과 소외계층에 대한 일관된 관심으로 역대 어느 영부인보다도 존경받아 왔던 이희호 여사였기에 어쩌면 그럴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을 떨칠 수 없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머니로서 그가 겪고 있을 마음 고생이 얼마나 클까 싶어 안쓰럽기조차 하다. 김대중 대통령이 “내 자식들이 문제를 일으킨 것에 대해 국민께 사과한다”고 한 뉴스를 들을 때 ‘자식’이라는 말이 얼마나 큰 울림으로 다가오며 가슴을 철렁하게 했는지. 사실 자식 키우는 이 땅의 부모라면 다시 한 번 자식 키우는 것의 어려움과 함께 부모라고 해서 자식의 삶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많지 않은 세태를 떠올리며 분노를 넘어 허탈해했고 연민도 느꼈을 것이다.

엄마 노릇을 하다보면 자식에 대해서는 맹목적 애정에 빠져 제 자식의 참 모습을 제대로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엄격하게 자식을 대한다는 게 쉽지 않음을 절감하게 된다. 요즘 아이들의 맹랑한 처신도 어쩌면 우리들 부모의 맹목적 애정이 만들어 낸 것인지 모른다. 공부만을 지상 과제로 여겨 옳고 그름의 분간과 해야 할 일과 해선 안될 일을 가르치는데 등한히 했던 것을 어찌 부정할 수 있겠는가.

부모 노릇이 썩 훌륭했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아예 부모 노릇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던 엄마로서 카드회사에 어버이날을 빌려 간절히 부탁하고 싶다. 수입이 한 푼도 없는 아이들에게 지금처럼 마구 카드를 발급하는 일은 제발 멈춰 달라고. 110만명에 이르는 신용불량자는 카드재벌회사가 방조한 카드라는 신종 마약 중독자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어버이날 선물도 카드 빚?▼

이 세상의 어느 민족보다도 평등의식이 강하다는 우리 국민이 그 평등에의 욕구를 소비의 평준화를 통해 누리려 든다면 우리들 삶은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까. 가족 붕괴를 일으키는 원인이 단지 남편과 아내의 성격 불일치라거나 가정 폭력과 외도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들보다 좀 더 거칠고 강한 기세로 우리 사회의 중심을 무너뜨리는 힘은 더 많은 부에 대한 갈망과 달콤한 마취제 같은 기쁨을 안겨주는 소비에의 욕구일 것이다.

어버이날에 자식이 안겨주는 선물을 받으면서 혹시 이 애가 카드로 긁은 것은 아닌지, 나쁜 일을 해서 산 것은 아닌지 걱정해야 하는 현실을 더 이상 방치해야 할 것인가. 우리 아이들이 더 황폐해지기 전에 가족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김향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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