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가다]<7>대지진 딛고 일어선 고베시민

  • 입력 2002년 5월 7일 17시 54분


《4월25일 오전 11시반 고베(神戶)시 산노미야(三宮)역 앞 ‘한신·아와지 다이신사이(阪神·淡路 大震災) 부흥지원관’. 고베시 소방국 음악대의 힘찬 연주와 함께 시민들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피닉스(불사조)’로 불리는 ‘다이신사이 부흥지원관’이 월드컵 종합안내센터의 ‘고베 서포터스 빌리지’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7년 전 대지진의 피해자를 돕기 위해 설립된 ‘지원관’이 월드컵을 계기로 고베 시민이 세계로부터 받은 온정과 지원을 보답하는 중심지로 바뀐 것이다.》

1995년 1월17일 오전 5시46분. 일본 남동쪽 아와지섬에서 발생한 진도 7.3의 강진이 잠든 고베를 덮쳤다. 무너진 고가도로가 인가를 덮쳤다. 열차 선로는 엿가락처럼 휘었다. 곳곳에서 불기둥이 치솟았다. 파괴된 건물더미에 고베는 갇혔다. 6400명이 죽고 25만여채의 건물이 무너졌으며 32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피해액은 우리나라 한해 예산과 거의 맞먹는 100조원.

다음해 크리스마스 때 고베 시민은 값진 선물을 받았다. 2002년 월드컵 개최지로 고베시가 선정된 것. 월드컵 때까지 도시를 복구하기 어렵다는 회의론도 있었다. 하지만 이 선물은 고베시의 꿈과 희망이 됐다. 고베시와 효고(兵庫)현은 9000억엔(약 9조원) 규모의 부흥기금을 설립, 피해 복구를 앞당겼고 이재민이 입주할 공영 주택을 지었다.

월드컵을 한달여 앞둔 고베는 7년 전 모습을 상상하기조차 힘들 만큼 새 도시로 변했다. 가장 피해가 컸던 고베시 중심가 산노미야는 인파로 북적거리고 상점마다 온갖 상품들이 넘쳐났다. 고베 시청을 중심으로 길게 뻗은 ‘플라워 로드’도 예전의 활력을 되찾았다.

고베시는 20세기형 도시에서 21세기를 향해 날개를 펴는 새 도시로 탈바꿈했다. 인공섬 ‘포트 아일랜드’에는 21세기형 첨단 의료산업 도시가 들어서고 있다. 고베시는 ‘첨단의료센터’와 ‘과학종합연구센터’를 짓고 있으며 머잖아 의료 관련 벤처기업 활성화를 위해 ‘메디털·비즈니스 지원센터’도 착공할 예정이다.

또 멀티미디어와 문화를 테마로 한 ‘고베 멀티미디어 문화도시’와 ‘고베필름오피스’로 대표되는 영화산업 단지도 완공 단계다. 고베시는 2005년에 완공될 국제공항을 일본의 종합 물류거점으로 키워나갈 예정이다.

고베의 월드컵 경기장은 ‘윙 스타디움’이다. 지진의 폐허로부터 날개(윙)를 달고 비상한다는 뜻이다. 월드컵이 있었기에 고베시는 뚜렷한 목표를 가질 수 있었고 다시 날 수 있게 됐다.

"우리는 희망을 꽃피웠습니다"

이 과정에서 희망을 잃지 않은 시민의 힘이 재건의 큰 밑바탕이 됐다.

고베가 고립됐을 때 주민들의 아픔을 달래준 것은 자발적으로 구원·구호에 앞장선 시민들이었다. 매일 평균 2만명의 자원봉사자가 식수와 음식물을 날랐고 쓰러진 집을 일으켜 세웠다. 이때의 자원봉사자들이 이제는 월드컵을 위해 뛰고 있다. 세계 각지에서 답지한 온정을 정성어린 손님맞이로 보답하겠다는 것.

재일교포들도 힘을 보탰다. 이들은 직장이던 케미컬슈즈 공장이 대파돼 아직도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지만 200만엔(약 2000만원)의 성금을 모아 월드컵 개최를 위해 써달라며 고베시에 맡겼다.

고베시 자원봉사자들은 매주 지도그리기를 한다. 정확하고 빠른 서비스를 위해 안내소 주변의 화장실, 공중전화, 은행, 편의점 등의 위치를 조사해 매주 지도를 그리는 것. 고베시 월드컵 추진실 자원봉사담당 우에니시 겐지(上西賢治) 과장은 “지도 그리기 ‘숙제’를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자원봉사자 다다 도시히로(多田俊宏·40·회사원)는 “고베시 어디에서도 7년 전 지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지만 우리 가슴속에는 여전히 치유되지 않는 마음의 빚과 상처가 남아있다”면서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치러 마음의 상처마저 깨끗이 씻어낼 것”이라고 말했다.

김창원기자 changkim@donga.com

▼고베의 칠레인 ‘축구 전도사’메릴리안 3父子▼

고베시의 북쪽 로코(六甲)산 기슭에 있는 칠레음식점 ‘칠레노’를 경영하는 칠레인 메릴리안 3부자(父子). 최고급 진주 산지로 유명한 고베 시민의 사랑을 받는 ‘숨은 진주’다.

이들은 ‘못 말리는 축구광’. 일본인과 결혼해 고베에서 24년째 살고 있는 아버지 다고베르토 메릴리안(왼쪽)은 고베시 프로축구팀 ‘빗셀 고베’의 산파역을 했다. 그는 93년 ‘칠레노’를 자주 찾는 축구광들과 프로축구팀 유치를 위한 시민 모임을 결성했다. 이 단체는 4년간 줄다리기 협상을 벌여 실업축구팀 ‘가와사키(川崎) 제철’을 97년 고베의 프로축구팀으로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대지진으로 실의에 빠진 고베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라도 프로팀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오레 고베’라는 월드컵 응원가를 만들어 고베시에 헌정했으며 둘째아들이 이 응원가를 불렀다.

큰아들 크리스티앙(오른쪽)은 일본에서 8명뿐인 국제축구연맹(FIFA) 공식 어시스턴트로서 FIFA와 월드컵 개최지 간 원활한 업무 처리를 돕고 있다. 크리스티앙씨는 “칠레도 1962년 지진이란 시련을 딛고 월드컵을 치른 적이 있다”면서 “고베가 대지진의 참화를 극복하고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Let's go Japan]경기장 활용 고심하는 地自體▼

‘월드컵 경기장은 빚의 전당?’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꿈의 구장’인 월드컵 경기장이 운영비도 못 건지는 천덕꾸러기가 될 것인가. 일본 전문가들은 10개 경기장 가운데 ‘삿포로 돔’ 등 한두 곳만 흑자 운영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때문에 일본 월드컵 개최지 지방자치단체들은 경기장 활용 방안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일본에서 가장 높은 활용도를 보이고 있는 경기장은 ‘요코하마 국제종합경기장’. 이 경기장은 종합스포츠센터 개념으로 설계됐다. 스포츠 의과학센터와 22종의 풀이 있는 스포츠 커뮤니티 플라자 등이 있다.

성인은 1시간에 500엔(약 5000원), 어린이는 1시간에 250엔(약 2500원)을 내면 스포츠 커뮤니티 플라자를 이용할 수 있다. 연간 40만명의 시민이 이 경기장을 이용한다. 또 사용일도 연간 100일가량으로 매우 많은 편이지만 연간 운영비 9억엔(약 90억원) 가운데 6억엔(약 60억원)을 세금으로 충당하는 형편이다.

수도 도쿄(東京)에 가까워 각종 이벤트를 유치하기 쉽고 인기 축구팀 우라와렛즈의 연고지에 있는 일본 최대 축구전용구장인 ‘사이타마스타디움’도 연간 관리비 7억엔 가운데 4억엔을 세금으로 메우고 있다.

월드컵 경기장의 가장 큰 돈벌이는 가수의 대형 공연. 요코하마 국제종합경기장은 음악회를 열어 이틀만에 1억엔(약 10억원)을 번 적이 있다. 하지만 수만명을 불러모을 수 있는 가수의 공연을 기획하기는 쉽지 않다.

월드컵 경기장을 운영하는 지방자치단체들은 “시민들이 경기장을 이용하고 청소년들이 각종 경기를 보며 꿈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돈 벌려고 경기장을 지은 것이 아니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별취재팀>

하준우기자 hawoo@donga.com

이진구기자 sys1201@donga.com

주성원기자 swon@donga.com

김창원기자 chang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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