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진우/폭력이 민주화 운동?

  • 입력 2002년 5월 1일 18시 57분


민주화 과정에서 ‘희생 당한’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겠다는 의도로 이루어진 결정 하나가 지금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일파만파로 번져가고 있는 이 사회적 충격의 발단은 1989년 시너를 뿌리고 불을 질러 경찰관을 숨지게 한 부산 동의대 사태 연루자들을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한 민주화보상 심의위원회의 결정이다.

한편에는 이 사태를 권위주의 정부와 사학 비리에 항거한 80년대 민주화의 상징적 사건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는 학생들의 ‘폭력’ 행위를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한 이번 결정이 결국 ‘민주적 가치’에 관한 사회적 합의를 파괴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동의대 사태’ 정당화 안돼▼

이러한 분열의 조짐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독재 정권에 저항했던 사람들 덕분에 어느 정도 민주주의를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어느 누구도 민주화 운동의 근본 동기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으며 그 목적과 결과를 의심치 않는다. 민주화운동은 근본적으로 폭력을 이성으로 대체하려는 정치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어떤 정부가 폭력의 수단으로 권력을 독점함으로써 비판적 담론과 사회적 합의를 원천적으로 봉쇄한다면, 어느 누가 그 정부에 저항하지 않고 민주화운동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기 때문에 독재정권이 길면 길수록 저항 자체가 모든 수단을 정당화하는 절대적 목적이 될 가능성이 그만큼 커진다.

그렇다면 인명을 해치는 폭력도 민주화운동의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인가. 필자는 민주화보상 심의위원회의 이번 결정이 바로 이제까지 애써 망각하려고 했던 이 민감한 문제를 건드렸기 때문에 사회적 충격을 야기했다고 본다. 이 문제는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세력들의 이해관계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민감하지만, 우리가 공동으로 추구하는 ‘민주적 가치’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 측면에서 근본적이다.

우선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의 제거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을 상기하면 우리는 이 물음에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다. 우리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마키아벨리의 말에 대해 ‘좋은 목적’이라는 단서를 붙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학생들을 교육시키겠다는 좋은 동기에서 행사된 사랑의 매가 학생들의 인격 또는 생명을 심각하게 훼손할 때에도 정당화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교육인지 확신할 수 있는가. 나는 어떤 목적이 과연 좋은 것인지 아닌지를 분간할 수 있는 기준은 바로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사용하는 수단의 적절성이라고 생각한다.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정당하지 못한 수단을 필요로 하는 목적은 대체로 정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권위주의 정부에 대한 저항의 의미와 마찬가지로 분명한 것은 동의대 사태에 투입되었다가 숨진 경찰관들 역시 민주화 과정의 ‘희생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어제까지 대학을 같이 다니던 학생들을 전투경찰과 시위대로 대치하게 만든 것은 왜곡된 권위주의의 정치구조가 아닌가. 평화적으로 시위하면서 때로는 안정과 개혁에 관해, 그리고 때로는 민주적 가치에 관해 서로 토론할 수 있는데도 언제부터인지 이 쪽에 있으면 친구이고 저 쪽에 있으면 적이라는 식으로 사회를 분열시킨 것은 각각의 집단에 내재하는 비민주적 폭력성 때문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한 쪽의 희생만을 부각시킴으로써 다른 쪽의 희생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민주적 가치 불신만 키울뿐▼

끝으로 행위를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속담처럼 행위는 무릇 행위 자체로서 판단되어야 한다. 인류의 역사가 말해주는 것처럼 ‘명예’는 행위가 위대할 때 사회적으로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보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침묵하고 행위하지 않을 때 권위주의에 저항하는 용기 있는 행위는 명예로울 수 있지만 민주의 이름으로 사용되는 폭력 행위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는 까닭에 결코 명예로운 것이 아니다.

사회적 문제를 들고 거리로 나가는 행위는 명예로울 수 있지만 화염병과 쇠파이프를 집어든 손은 결코 명예롭지 않다. 폭력은 폭력일 뿐이다. 동의대 사태가 민주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자체가 민주화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번 결정이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시키기는커녕 폭력을 은연 중 정당화함으로써 민주적 가치에 대한 불신만 키울까봐 두렵다.

이진우 계명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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