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홈]주택사업 베테랑 5人이 말하는 주거문화 과거-현재-미래

  • 입력 2002년 4월 22일 17시 17분


《지난 주말 서울 강남구 역삼동 아파트 모델하우스.

20년 안팎 주택사업을 해온 베테랑 5명이 모였다.

80년대 말 부동산 붐과 90년대 초 신도시 건설, 98년 외환위기와 함께 불어닥친 부동산값 폭락, 그리고 또 다시 찾아온 호황….

주택시장 일선 현장에서 이들 5명이 온몸으로 겪어온 굵직굵직한 사건 목록이다.》

“돌이켜보면 아파트는 그냥 먹고 자는 곳이라기 보다는 시대를 반영하는 그릇이었어요.”

78년부터 분양대행을 해온 풍화산업개발 장붕익 사장이 운을 뗐다. 그는 대표적인 사례로 76년 불임 수술자에게 아파트 우선청약권을 주었던 일을 꼽았다.

“집 한 채 만들려고 불임수술을 받는 장면을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때는 적잖은 사람들이 수술대에 올랐어요.”

“맞습니다. 부동산 투기도 따지고 보면 산업화 시대의 부산물입니다.”

고급 빌라 개발업체인 대가건설 차진태 사장이 말을 받았다. 시골을 떠나 도시로 밀려드는 저임금 근로자들을 수용할 공간이 부족하다보니 결국 집값 폭등으로 이어졌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들이 모델하우스를 둘러보며 주고받는 대화에는 한국 주거문화의 과거 현재 미래가 병풍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아파트가 한국의 대표적인 주거양식으로 자리잡은 것은 서울 강남 개발과 함께 시작됐다.

“그땐 강남이 모래밭 아니면 논이었어요. 79년까지 반포 잠실 도곡 개포가 아파트촌으로 개발됐습니다. 82년부터는 목동과 상계동이 뒤를 이었지요.”(우림건설 노승기 부사장)

77년 분양된 반포 2단지 16평형 가격은 579만7000원. 당시 쌀 한 가마(80㎏) 값은 2만4196원이었다.

가뜩이나 집이 부족했던 때였다. 아파트는 분양과 동시에 천정부지로 값이 뛰었다. ‘복부인’이 신문 1면을 장식했다.

정부가 나섰다. 분양가 규제와 전매 금지, 소형평형 의무비율 등이 뒤따랐다.

“규제가 있는 곳엔 편법이 있기 마련입니다. 별별 부동산재테크 아이디어가 속출했어요.” 컨설팅업체인 ‘씨드50’ 이승우 사장의 회고가 이어졌다.

그가 들려준 추억의 부동산재테크 중에는 속칭 ‘전과기록 만들기’로 불렸던 청약 횟수 늘리기도 있다.

“80년대에는 1순위 청약에서 6번 떨어진 사람에게 속칭 ‘0순위’ 자격을 줬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경쟁률이 높을 것 같은 아파트에만 청약해 낙첨 횟수를 늘린 사람이 적잖았습니다.”

“한 때 그렇게 6번 떨어진 통장은 엄청난 고가에 팔렸지요.” 오피스텔 시행사인 ‘신일산업개발’의 최문규 사장이 말을 이었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분양가가 3000만원 정도였는데 청약통장 가격만 2000만원에 거래됐을 정도였으니까요.”

모델하우스도 각종 볼거리를 쏟아냈다. 지금과 달리 채권입찰제가 있었던 시기. 모델하우스 앞에는 떴다방 대신 채권을 사려는 사채업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부동산 열기는 89년에 정점에 달했다.

“아파트뿐만 아니라 오피스텔도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오피스텔을 지을 만한 상업용지 땅값이 하루에 평당 100만원씩 올랐을 정도였어요.”(장 사장)

열병처럼 번졌던 투기열풍은 92년 신도시 입주와 함께 막을 내렸다.

95년까지 이어진 집값 안정세. 96년과 97년 집값은 다시 반짝 상승세를 보였지만 외환위기와 함께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야기가 최근 상황으로 넘어오자 주택경기 전망이 화두가 됐다.

이 사장은 99년부터 다시 불붙기 시작한 부동산시장이 이제 ‘끝물’이라는 진단을 내놨다.

“80년대 말 주택경기가 정점을 지나 꺾어질 때도 이랬습니다. 강남 아파트에 강남 사람들이 몰리는 게 아니라 서울 전역에서 청약이 들어옵니다.”

차 사장도 이에 동조한다. “경기가 끝물에 접어들면 단돈 몇 백 만원만 들고 청약에 나서는 이들이 부쩍 늘어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요.”

실수요가 충족되면 가수요가 붙기 시작하고, 이 시점부터 주택경기가 하락세에 접어든다는 설명이다.

반면 경기 지속론을 앞세운 공세도 만만치 않았다.

“서울은 구조적으로 아파트 공급이 제한돼 있습니다. 지금처럼 각종 규제가 쏟아져 나오면 더욱 공급은 위축됩니다. 적어도 서울 주택경기는 당분간 지속될 겁니다.”(노 부사장)

엇갈리는 전망 속에서도 과열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했다. 주거보다는 투자를 염두에 둔 주택 매입이 정도를 넘어섰다는 것이다.“아파트는 정도가 덜하지만 오피스텔은 이미 청약자의 30% 이상이 계약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사업자나 실수요자 모두 고민해야 할 대목입니다.” (최 사장)

“어떤 아파트를 사야 되느냐고요? 교통과 편의시설을 감안한다면 답은 뻔하지요.”

차 사장은 아파트 선택 기준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다고 설명했다. 눈이 번쩍 뜨이는 묘책은 없다는 것.

이 사장은 여기에 힌트 하나를 더했다.

“가급적이면 지역에서 제일 좋은 아파트를 사야 합니다. 가격 상승기엔 주변 시세를 주도하지만 하락기에는 낙폭이 적기 때문입니다.” 지역대표 아파트를 고르는 게 안전하다는 설명이다.

노 부사장은 아파트를 소유하기보다는 이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꿔야 한다는 조언을 덧붙였다.

“앞으로 몇 년 동안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곤 아파트값이 큰 폭으로 오르기를 기대하긴 어렵습니다. 금리 등 각종 변수도 이미 가격 상승을 가로막는 쪽으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결국 소유를 통한 시세차익보다는 이용을 통한 효용 획득이 중요해지는 시기입니다.”

고기정기자 k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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