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환수기자의 장외홈런]야구기자는 10번 타자

  • 입력 2002년 4월 8일 17시 59분


야구기자는 공기와 같은 존재입니다. 항상 현장에서 그들과 함께 하지만 특정 팀을 선호하거나 승부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배웠습니다.

그러나 사람 일이 어디 그렇게 되나요. 요즘 연예계의 샛별로 떠오르고 있는 강병규가 두산에서 야구인생의 마지막 불꽃을 태울 때인 99년 5월로 기억합니다. 훤칠한 용모 만큼이나 걸쭉한 입담을 자랑하는 그가 저의 ‘수덕(手德)’을 눈치챘던 모양입니다. 냅다 ‘신의 손’ 좀 빌리자며 악수를 청하더군요. 이후 그는 파죽의 6연승을 달렸고 자신의 프로생활에서 한해 가장 많은 승수인 13승을 올렸습니다. 뿌듯하더군요.

사실 이런 경우는 누구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니고 딱히 제 손 덕도 아닐 터이니 괜찮습니다. 그러나 반대 경우도 있습니다. 기자 초년병 시절인 90년입니다. 당시 저는 꽤나 의욕을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LG의 사령탑을 맡고 있는 당시 태평양의 김성근 감독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처음보는 저에게 다짜고짜 반말부터 했고 “그때 투수를 바꾼 게 화근이 아니었나요”라는, 지금 생각하면 지극히 도를 지나친 저의 질문에 “그럼 당신이 감독 하시오”라며 자리를 피하는 게 아닙니까. 기분이 상했지요. 저는 가슴에 비수를 품었습니다.

90년 시즌이 끝났습니다. 태평양은 7개팀중 5위에 그쳤고 시즌 막바지에는 부상선수가 줄을 이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환호했습니다. 김감독은 ‘승리를 위해선 선수를 기계의 부품으로 여기는 사람’이란 악의적인 기사가 나갔습니다. 마침 ‘임호균 파문’도 저의 레이다망에 걸려들었습니다. 김감독은 시즌 직전 구단에 ‘임호균이 선발로 5승을 못하면 사표를 쓰겠다’는 비밀문서를 교환했지요. 저는 앞뒤 가릴 것이 없었습니다.

결국 김감독은 태평양에서 중도 퇴진했습니다. 김감독 본인에게 뿐만 아니라 야구계에 큰 빚을 지게 된 셈이었죠. 이후 세월은 흐르고 연륜이 쌓여가면서 저의 눈엔 그때는 보지 못했던 진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임호균 파문이 대표적입니다. 은퇴 기로에 서 있는 고참선수 하나에까지 자신의 목을 걸었던 그의 충심을 저는 몰랐던 것입니다. 한번 생각을 바꾸니까 그의 까탈스런 성격도 이해가 되더군요. 저는 이후 김감독의 팬이 됐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렇듯 기자도 선수단과 함께 호흡을 하는 프로야구의 한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선수단이 붓이라면 기자는 종이겠지요. 어느덧 야구기자로 13시즌을 맞게 됐습니다. 그동안 저의 종이에 온갖 그림을 그려준 그들의 얘기를 펼쳐보겠습니다.

zangpab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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