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탈분단의 정치경제학과 사회구성'

  • 입력 2002년 3월 8일 18시 32분


◇ 탈분단의 정치경제학과 사회구성/정성기 지음/362쪽 1만5000원 한울아카데미

수천의 지식인과 운동가들이 밤새워 논쟁하던 시대가 있었다. 자신을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라 자임하고, 또 스스로 진정한 혁명주의자가 되고자 했던 논쟁이 있었다. 한국 자본주의와 한국 국가의 근본적 성격을 논하고 그것을 타파할 실천전략을 둘러싸고 밤샘 논의를 벌였던 논쟁, 지금은 까마득한 과거처럼 보여지는 1980년대의 이 논쟁을 우리는 ‘사회구성체 논쟁’이라 불렀다.이 논쟁은 사회과학적 분석의 성역과 금기를 타파했다는 긍정성과 함께, 저자도 지적하고 있듯이 현존 사회주의의 위기와 타락에 대한 인식의 부재, 비타협적인 논쟁 스타일, 이론주의적 경향이나 환원주의적 경향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을 드러냈다고 평가된다.

‘사회구성체 논쟁의 부활과 전진을 위하여’라는 부제를 단 책을 받아든 필자의 느낌은 반가움 그 자체였다. 그것은 필자가 평상시 사회구성체 논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었다. 어떤 점에서 한국 근현대사와 사회과학의 온갖 쟁점들이-비록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에 압도당한 방식으로였지만-모두 제기됐음에도 불구하고, 논의가 마치 유행처럼 번지다가 단절된 뒤 그 쟁점들이 깊이 천착되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어떻게 과거의 논쟁을 다시 보고 있는가 하는 것은 내심 궁금했다.

이런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 책을 단숨에 독파할 수 있었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1부는 저자의 지적 궤적과 철학적 입장을 드러내주는 5편의 논문을 담고 있다. 2부는 사회구성체 논쟁의 재론이라는 문제의식을 갖고 쓰여진 5편의 논문과 오늘날의 정당을 마르크스 경제학의 ‘잉여’ 개념으로 비판하며 현존 정당정치의 극복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논문들로 구성돼 있다.

이 책에는 저자의 신선한 관점과 주장들이 잘 담겨 있다. 저자는 기존 사회구성체 논쟁의 근본적 한계가 인간과 사회에 대한 도그마적 인식에 있다고 보고 진리관이나 인간관 및 인식론에서부터 재성찰을 시작했다. 저자는 존재와 세계, 자연과 인간, 사회, 역사에 대한 기존의 이분법적 인식, 즉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 진화론과 창조론,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 보수적인 자유주의 경제학과 진보적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좌우파로 명명되는 이분법적인 근대인식론을 비판하면서, 탈(脫)근대적 출구를 찾고자 한다.

여기서 저자는 보다 주체적인 지적 태도를 중요하게 부각시킨다. 서구중심적 세계관과 패러다임에 묶여 있는 것은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 해당된다. 이런 저자의 인식에서 볼 때, ‘민족 및 체제의 분단문제와 사회구성체문제, 지역문제를 별개로 보는 인식’은 극복돼야 한다.

그렇다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까. 저자는 그 변화가 과거와 같은 중앙집중적 국가전복전략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역자치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새로운 사회구성의 실험과 사회구성적 자치를 통해 쟁취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체적 탈근대, 주체적 탈분단을 바로 지역현장에서부터 생활공동체운동의 차원에서 가꿔 가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탈근대, 탈자본주의, 탈사회주의’적 전망에서의 ‘사회만들기’, 아래로부터의 사회구성라고 말한다.

저자의 이런 신선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평자는 사회구성체 논쟁의 부활을 위한 저자의 문제제기가 미완으로 끝났다고 볼 수밖에 없다. 먼저 한국 사회구성체 논쟁은 핵심적으로 한국 자본주의와 한국 국가의 성격에 대한 급진적 분석이었다.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로 명명하건 종속적 독점자본주의로 규정하건 문제는 일관된 관점에서 한국자본주의의 구조적 성격과 그 변화를 정치경제학적으로 해명해 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단절됐다. 이제 사회구성체 논쟁의 부활은 바로 이런 단절을 뛰어넘는 데서부터 시작돼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는 이에 대한 새로운 진술이 많지 않다. 오히려 메타이론적 성찰이 있을 뿐이다.

둘째, 사회구성체 논쟁은 실천연계적 논쟁이었다. 진보적 이론과 진보적 실천의 통합을 지향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관점에서 이 책을 볼 때 저자의 구체적 실천 방향이 무엇인지 모호하다. 아래로부터의 사회구성이라고 하는 윈칙적 강조와 새로운 실천의 당위성 이상을 찾기 어렵다.

셋째, 이러한 실천대안에서의 모호성은 기성 정당 해체론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는 물론 저자가 근대 대의민주주의의 한계성을 인식하고 좌우파적 패러다임을 넘어서려는 문제의식에서 제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저자는 현존하는 한국의 기성정당들의 자진해체를 요구한다. 진보정당마저도 근대적 정당질서 내에 적응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며 진보정당의 해산도 요구하고 있다. 낙천 낙선운동 같은 경우도 절대다수 국민들을 구경꾼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에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비판한다.

바로 이런 서술에서 이 책의 근본적 문제의 일단이 드러난다. 즉, 현존하는 근대적 대의민주주의와 정당체제의 근본적 한계성을 인식하고 ‘탈근대적 대안’을 만들어가려는 저자의 철학적 입장을 바로 현실에 투사함으로써 나타나는 역(逆)의 비현실성 내지는 비실천성의 문제다. 이런 점에서 보면 다양한 무정형의 풀뿌리운동에 대한 관심과 함께, 현재의 민중운동이나 시민운동이 다양하게 벌이고 있는 운동정치에서 ‘제도정당의 정치독점’을 넘어서는 단초를 찾는 것도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평자를 당혹하게 하는 것은 서술의 비논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저자의 에세이적 진술, 철학적 혹은 사상적 입장, 경제학적인 구체분석 등이 매 절에서 혼합돼 있다. 어디까지가 사회과학적 분석이고 어디까지가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주장하는 것인지가 불분명한 부분이 대단히 많았다.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이는 필자의 협소한 시각에 기인할 수도 있겠는데-동양사상 등 전통사상의 재발견을 위한 시도, 자본주의를 단순히 왜곡된 구조로만이 아니라 왜곡된 욕망의 체계로 보고자 하는 저자의 시각, 지역에서부터 진정한 새 사회만들기가 시작돼야 한다는 신념, 인간과 사회라는 근본적인 쟁점에서부터 한국사회를 검토하고자 하는 저자의 근본주의적 자세, 사회구성체 논쟁이 의문시하지 않았던 많은 전제들에 대한 쟁점화는 지적 게으름에 빠져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자극이 되리라 생각한다.조 희 연 성공회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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