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커튼 걷어젖힌 보통사람들의 역사 '사생활의 역사'

  • 입력 2002년 3월 8일 17시 22분


◇ 사생활의 역사(전 5권 중 3권)/폴벤 외 편집/주명철 외 번역

각권 800여쪽 각권 4만3000원 새물결

공선사후(公先私後)가 중시된 동양 사회에서 ‘사생활’은 늘 공적 생활보다 뒤처지는 영역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언제라도 포기돼야 하며 차라리, 음습하고 감춰야 하고 내세우지 못하는 영역이다.

사생활은 또 어쩌면 여자의 영역이다. 현실 세계의 주역인 남자들은 정치를 이야기하고 발전을 이야기해야 마땅하므로 한가한 여자들이 시간을 때우기 위해 떠드는 한낱 ‘수다’의 영역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프랑스 명문출판사인 ‘쇠유’에서 1985년에 펴낸 역사 시리즈인 ‘사생활의 역사’는 사생활이라는 단어가 주는 비밀스러움, 하찮음이라는 선입견을 무너 뜨린다. 나아가 사생활이야말로 우리 인간의 삶이 솔직히 녹아 든 영역이며 삶을 사생활이라는 영역에서 볼 때야말로 인간과 역사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갖게 해 준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인간의 삶이 사생활 아닌 것이 있는가. 살고 죽고 사랑하고 욕망하는 삶의 모든 것이 온전히 사생활의 영역 아닌가.

‘사생활의 역사’는 궁정이나 정치, 왕조 중심의 역사서가 아니다. 제목 그대로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부터 19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장삼이사(張三李四)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의 사적인 생활에 대한 기록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역사 서술 방식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 중에는 근래들어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는 아날학파류의 미시사(微視史) 서적의 아류를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주지하다시피 미시사는 왕과 연표 중심의 계량적 연구방식이 아닌 당시 시대를 살았던 인간의 구체적 삶의 모습을 녹이는 역사 연구방식이다. 굳이 예를 든다면 워털루 전쟁 대목에서 나폴레옹 입장이 아닌 졸병들 입장에서 서술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미시사가 역사를 조명하는 부분이 다르다면 ‘사생활의 역사’는 아예 렌즈 자체가 다르다고나 할까.

고대 로마편의 소제목을 한번 보자.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죽을 때까지’ ‘결혼’ ‘일과 여가’ ‘즐거움과 무절제’…. 프랑스혁명에서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를 서술한 4권의 소제목도 ‘부모와 자식’ ‘결혼과 가정’ ‘친척 관계’ ‘잘 사는 동네의 건물’ ‘갈등의 유형과 고리’…. 이런 식이다. 제목만 보면 이것이 과연 어느 시대를 이야기하는 지 가늠하지 못한다.

이 책은 어느 시대나 인간이 겪는 생사의 문제, 희로애락의 문제를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한 것이다. 각 시대의 남과 여, 그들의 사고와 감정, 몸, 삶의 태도와 관습, 흔적, 기호들을 관찰하면서 양피지 문헌에 남아있는 일기, 메모, 편지, 저택의 돌에 새겨져 있는 사적인 이미지들이 사료(史料)로 등장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어째서, 이런 방식이 나왔을까.

그것은 정치적 혼동을 경험한 70년대 프랑스 지식인들의 고민에서부터 출발한다. 이즘(ism)과 거대 담론에 익숙했던 그들이 겪었던 허무와 지적 방황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내면적 성찰로 나아갔고 과거 역사속에서의 인간에 대한 탐구로 이어졌다. 식민의 시대와 해방과 전쟁을 거치면서 근 현대를 ‘정치’ ‘민족’ ‘국가’라는 키워드 속에서 살았던 우리가 90년대 들어 개인과 나를 고민하기 시작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우리야말로 독재와 민주에 대한 해부는 있었을 지언정, 인간과 삶에 대한 성찰은 부족하지 않았는가. 16년전 프랑스에서 무려 20만질이 팔려 나갔으며 14개 언어로 완역된 초베스트셀러가 2002년 오늘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무엇보다 책을 덮으면서 기자의 뇌리를 스친 단 한마디의 감탄사는 ‘과연, 삶은 이토록 같으면서 다른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를 붙잡고 있는 고통의 근원은 어쩌면 당대의 시대와 제도가 만들어 낸 선입견과 고정관념일지도 모른다는 위험한(?) 의심을 만들어 낸다. 예를 들어 이 책에 따르면 고대의 노예는 우리가 생각했던 불행한 인간이 아니었다. 노예에게 잔인하거나 화를 잘 내는 주인은 도덕적으로 나쁜 평가를 받았고 물질적으로도 손해를 입었다고 한다. 노예와 주인은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아니라 양자의 이해관계가 일치한 거래관계였던 것이다. 또 건전한 부르주아 시민만 탄생한 것으로 알려진 19세기는 정작 호모섹슈얼과 보헤미언 댄디같은 불건전한(?) 사람들이 등장한 세기이며 인간 내면의 어두운 세계에 대한 탐색이 시작된 세기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의 행복과 역사는 진화하는 것인가. 고대시대 인간은 지금보다 불행했나? 아니다. 오히려 더 행복했다. 그들은 만나는 사람도 적었고 할 일도 적었기 때문에 선택도 적었고 혼란이나 방황도 적었다. 우리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실존의 고민도 없었다. 이같은 삶의 의문은 근대적 질문이며 기독교적 대답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 저자들의 설명이다.

제도와 시스템이 지금보다 허술했던 고대 사람들은 오히려 지금 사람들보다 더 자유로왔고 욕망에 더 충실했다. 21세기는 사실, 위선의 세기다. 개인 욕망의 극대화와 사생활 보호를 운운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타인의 모든 욕망을 맘대로 휘두르고 모든 행동을 24시간 들여다 볼 수 있지 않은가. 욕망이 억압당했다고 알려진 고대 사람들이야말로 자유롭고 사생활을 보호받았다.

이런 부러움은 결국 삶에 대한 여유와 오늘을 사는 인간 행동에 대한 무한한 관용을 가져다 준다. 삶을 더욱 풍부하게, 다채롭게, 가볍게 느끼게 한다.

이 책의 편찬 작업을 주도한 필립 아리에스와 조르주 뒤비는 국적과 전공영역을 허물고 프랑스 지성계의 대가 40여명으로 구성된 ‘드림팀’을 만들어 10여년에 걸쳐 완성했다. 이 책을 번역 출판한 국내 출판사도 5년이 걸렸다고 한다. 각권마다 800여쪽에 달하는 방대한 학술서가 속도감 있는 문체와 ‘눈을 위한 화려한 축제’라는 평이 따랐을 정도로 다채롭고 정교한 도판들로 지루함을 잊게 하는 것은 책을 만든 사람들의 이런 공력(功力)때문이리라.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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