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농구]만년후보 신세 삼성 강병수의 애환

  • 입력 2002년 3월 4일 17시 33분


나래 시절인 97과 97~98시즌 주전으로 펄펄 날던 때의 강병수.
나래 시절인 97과 97~98시즌 주전으로 펄펄 날던 때의 강병수.
삼성 썬더스 강병수(34)는 올시즌 단 한번도 코트에 서지 못했다. 경기가 있는 날은 언제나 경기장에 나오지만 유난스러운 오빠부대조차 그가 누군지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다.

강병수도 선발 출장에 대한 미련을 포기한 지 오래다. 하지만 후보선수라고 경기를 소홀히 할 수는 없다. 벤치에 앉는 순간부터 강병수의 눈은 살아 움직인다. 감독이 언제 출전 지시를 내릴지 모르기 때문. 비록 언제 뛸 수 있을지 기약은 없지만 상대 선수의 움직임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후반이 시작돼도 긴장을 늦출 수는 없다. 경기가 백중세거나 팀이 밀릴 낌새라도 보이면 “내가 한번 해보겠다”고 나서고 싶은 생각이 수백,수천번씩 가슴 속에서 메아리친다. 하지만 실제로 그래 본 적은 없다.

4쿼터 시작 버저가 울릴 때까지 감독이 쳐다보지 않으면 가슴 한편에서는 이미 ‘오늘도 종쳤다’는 아쉬움과 ‘그래도 단 1분이라도…’라는 미련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엉덩이를 의자 끝에 붙인 채 얼굴은 최대한 코트에 가까이 한 ‘전투자세’에서 엉덩이와 의자가 일체가 되며 편안한 관전자의 자세로 변하는 것도 이때쯤.

강병수에게 소원이 있다면 감독으로부터 ‘너 나가!’란 지시를 받아보는 것이다. 지난 시즌만 해도 강병수는 10번이나 그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단 한번의 기회도 잡지 못했다. 가끔 꿈 속에서나마 팀이 뒤질 때 교체멤버로 투입돼 역전승을 일구는 데 도움을 준 적은 있지만….

긴장한 채 벤치만 지키다 숙소로 돌아와 자리에 누우면 경기를 뛴 날보다 심신이 더 피곤해 곧바로 곯아떨어지는 것도 후보선수만이 느끼는 애환.

강병수도 한때는 잘나갔다. 농구 명문 송도고와 고려대를 거쳐 나래 블루버드(현 삼보 엑써스)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한 첫해 ‘3점 슈터’ 정인교, 득점왕 칼레이 해리스, 제이슨 윌리포드와 함께 팀을 준우승까지 이끈 것. 강병수의 농구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시절이었다. 파워포워드로는 크지 않은 1m91의 키로 국내 최정상급의 리바운드 실력(경기당 6.4개)을 뽐냈고 ‘수비 5걸’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삼성 썬더스의 최고참인 강병수는 코트에 서는 시간보다 벤치를 지키는 때가 더 많은 벤치워머. 하지만 강병수는 “결코 자신의 농구인생이 실패했다고 생각치 않는다”며 농구공을 든채 밝게 웃고 있다.원대연기자 yeon72@donga.com

다음 시즌에는 연봉도 1억1000만원으로 상승하며 프로선수로서 탄탄대로에 올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즌중 당한 무릎부상이 발목을 잡았고 97∼98시즌을 마친 뒤 일본에서 무릎치료를 받고 있던중 팀 후배 주희정과 함께 삼성으로의 트레이드를 통보받았다.

삼성에 오니 설 자리가 없었다. 자신의 자리에는 이미 박상관 이창수 김택훈까지 3명의 선수가 버티고 있었고 무릎도 좋지 않았다. 벤치를 지키는 시간이 늘며 “내가 왜 이런 수모를 당해야 되나. 꼴찌팀이라도 뛸 수 있는 팀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에 밤잠을 설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99∼2000시즌이 돼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이적 첫 해인 98∼99시즌 14경기에서 경기당 평균 9분27초를 뛴 뒤 99∼2000시즌에도 15경기에서 경기당 10분35초를 뛴 것이 고작. 경기출전이 워낙 불규칙적이다 보니 감각마져 무디어져 갔고 점차 경기중 감독이 자신을 쳐다볼까 두려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강병수를 힘들게 한 것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팀과 계약기간이 끝나는 해여서 벤치를 지키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이 소용돌이쳤다. 주위에서 ‘앞으로 뭐할거냐’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때쯤이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그를 구해준 사람이 바로 김동광 감독. 그의 친화력과 리더십을 익히 알고 있던 김 감독은 ‘전력에는 크게 보탬이 안되지만 팀에는 꼭 필요한 선수’라며 계약기간을 1년 연장해 준 것.

강병수는 ‘나보다 더 나은 선수가 많은데 자리를 마련해준 팀을 위해 최선을 다 하자’고 마음을 다잡았고 팀은 결국 2000∼2001시즌 창단 첫 정상에 올랐다. 덕분에 강병수도 팀 리더로서의 역할을 인정받아 선수생명이 1년 더 연장됐다.

하지만 강병수는 올시즌 단 1초도 코트에 서지 못하며 늘 가시방석을 걷는 기분이다. 지난 시즌에는 비록 벤치를 지키더라도 팀 성적이 상위권을 유지해 부담이 덜했지만 올시즌은 팀 성적이 곤두박질친 것이 마치 자신의 탓인 것 같아 고개를 들 수 없다.

강병수는 5월이면 계약이 만료된다. 그때쯤이면 영원히 코트를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식스맨이 된 순간부터 ‘내가 뭘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지만 딱히 준비해둔 것도 없다. 다만 자신의 전공을 살려 지도자의 길로 나서겠다는 방향만 정해뒀을 뿐이다.

“제가 레벨이 있습니까, 선수생활이 화려하기라도 했습니까. 하지만 이 정도 했으면 실패한 농구인생은 아니라고 위안을 삼을 수 있는 게 그나마 다행입니다.”

김상호기자 hyangsan@donga.com

▼결국 주전 꿰찬‘오뚝이 최명도’

SK 빅스 최명도

농구판에서 만년후보라고 평생 후보로 지내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화려한 주전에서 순간 방심한 탓에 후보로 전락, 코트에 나서지 못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주전→후보→주전

SK 빅스의 포인트가드 최명도가 대표적인 경우. 최명도는 98∼99시즌 코리아텐더의 전신인 나산에 입단, 주전 포인트가드로 45경기 중 44경기에 선발출장했다. 아뿔싸. 바로 다음시즌 KCC의 전신인 현대로 트레이드된 후 그에게 ‘2진’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이상민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 2시즌을 후보로 쥐죽은 듯이 지낸 최명도는 이번시즌 빅스로 말을 갈아탄 뒤 펄펄 날고 있다. 실업 기업은행 시절부터 장기인 겁 없는 과감한 플레이와 외곽포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후보→주전

정규리그 2위를 달리고 SK 나이츠의 제1의 식스맨은 석주일이다. 석주일의 장점은 여러 포지션을 감당해낼 수 있다는 것. 중고시절 센터를 보다가 이후 1m90에서 성장이 멈춰 포워드로 전향했다. 외곽슛을 보완하기 위해 남몰래 야간훈련을 밥먹듯이 한 것이 최인선감독의 눈에 띄여 전격 발탁된 케이스. 3점슛 성공률이 43%로 팀내 최고다. 지난해부터 식스맨으로 기용되더니 올시즌엔 선발멤버를 꿰차고 있다.

▽주전→후보

프로원년 사랑의 3점슈터로 인기몰이를 한 코리아텐더 정인교는 올시즌 단 한경기만 코트에 나섰다. 신분도 정식선수 아닌 수련선수. 98년 허재와 맞트레이드된 후 기아에서 적응하지 못한게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탓. 90㎏이 훨씬 넘는 체중을 전성기 때인 83㎏으로 돌려놓는 것이 급선무이지만 맘처럼 잘 되지 않고 있다.

전 창기자 j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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