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높고 깊은 추사의 삶과 혼 '완당평전'

  • 입력 2002년 3월 1일 17시 49분


완당평전(1,2)/유홍준 지음/각권 408쪽 18000원 학고재

‘과연,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제사 모시는 날이면 늘 우리집 젯상머리에 놓이던 병풍이 있었다. 무뚝뚝하고 험상궂은 한문 글씨가 빼곡이 내리닫이로 쓰인 8폭 병풍이었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라고 했다. 진품은 물론 아니고, 대량으로 복제한 물건이었다. 그 병풍 앞에 설 때마다 마음이 그렇게 불편할 수 없었다. 잘 쓴 글씨라는데 내게는 기괴했다. 나는 끝내 글씨의 묘(妙)를 알지 못하고 이 세상을 건너가야 하는 것인가, 싶었다. 진작 하지 못한 공부, 이제 와서 어쩌랴, 싶기도 했다. 그러나 글씨를 알지 못하는 나에게도, 중국 시안 비림박물관(碑林博物館)의 조전비(曺全碑) 앞에서는 고개를 숙인 적이 있다. 조전비에 새겨진 단아한 ‘조전비체’ 예서 850여 자(字)는 내가 각별히 좋아해서 때로 흉내내어 써보거나 집자하던 글씨다. 옛 글씨에 대한 나의 감상 수준은 조전비체에서 한발자국도 더 나간 것이 없다. 추사체는 그 대척점에 있는 것 같았다.

유홍준 교수의 ‘완당 평전’ 제 1권 ‘일세를 풍미하는 완당 바람’과 제 2권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를 스물 다섯 시간 동안 눈 부릅뜨고 읽었다. 비로소 느낌이 오기 시작한다. ‘교수 선생’(유 교수에 대한 북한인들의 호칭)의 친절한 안내를 좇으면 어쩌면 글씨의 묘를 조금 알게 될 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 학자들은 ‘완당 평전’ 같은 평전이나‘화인 열전’같은 열전에 어쩌면 이렇게도 무심했을까. 중국에는 스마첸의 ‘사기’의 ‘열전’이 있다. ‘열전’의 언어는 이제 우리말에 거의 편입되어 버린 것 같다. 서양에는 우리가 ‘플루타크 영웅전’이라고 부르는 열전이 있다. 영웅전 원제목 ‘비오이 파랄렐로이’는 직역하면 ‘위인 열전’이다.‘위인 열전’은, 나폴레옹과 베토벤에게는 ‘성서와 다름 없던 책’, 에라스무스에게는 ‘성서에 버금가게 신성한 책’, 에머슨에게는 ‘세계의 모든 도서관에 불이 날 경우 목숨 걸고 들어가서 꺼내고 싶은 책 세 가지 중의 하나’였을 정도이다.

열전이나 평전이 쓰여지기 어려운 까닭도 짐작할만하다. 추사의 경우 특히 그랬겠다. 그는 시, 서, 화, 불교, 금석학, 고증학, 경학에 두루 능한 선비였다. 추사, 즉 완당의 평전을 쓰자면 이것을 인문학적 관점에서 총체적으로 아우르고 추사가 힘겹게 살아낸 파란만장한 삶에 표정을 부여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런 일은 아무에게나 가능한 것이 아니다.

‘완당 평전’은 제목이 잘 드러내고 있듯이, 추사, 즉 완당의 삶을 전기적(傳記的)인 관점에서 돌아다 본 책이 아니다. 완당의 예술은, 그의 청국인 스승 옹방강이 열 여섯 자로 요약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사실을 밝히는 것은 책에 있고/ 이치를 따지는 것은 마음에 있네/ 옛것을 고찰하여 현재를 증명하니/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을 열쇠말로 삼지 않으면 뚫리지 않을 만큼 견고하다. 실사구시의 정신이 무엇인가? ‘헛된 말만을 간직하여 길을 헤매며 그것으로 세월을 다 보내는’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 의거하여 사물의 진리를 찾는’ 정신이다.

‘완당평전’은 실사구시의 정신으로써, 완당의 견고한 실사구시 정신의 속살을 뚫어내고 있는 듯하다. 이 책에서 나는 처음으로, 그토록 범접하기 어렵던 추사체 글씨의 진화사(변천론)를 읽었다. 이제 조금 알게 되니 조금 더 보이는 것 같다. 하지만 아직은 내것이 아니다. 어의(御醫) 유홍준은 귀하신 몸에다 손가락을 대고 촉진한 모양이나, 나같은 독자에게는 촉진이 언감생심이다. 하지만 내 손에는 저자가 건네준 명주실이 있다. 명주실에서 미약한 떨림이 느껴진다. 제 2권의 제목이 된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山崇海深)’는 청국인 옹강방이 실사구시의 정신을 제찬한 열 여섯 자 중의 마지막 넉 자 ‘산해숭심(山海崇深)’에 숨어 있다. 오래지 않아 완당의 예술을 즐길 수 있게 될 것 같다. 명랑한 예감이다.

이윤기 소설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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