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박재창/소신파 국회의장을 위하여

  • 입력 2002년 2월 26일 18시 15분


국회가 어렵사리 재개되었지만 여전히 불안하다. 실질적인 면에서 볼 때 우리 국회에는 안전 운항을 보장하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번 문제만 하더라도 그렇다. 여당의원의 발언 중 귀에 거슬리는 내용이 있다고 하여 다수당인 야당의원들이 단상으로 몰려가 발언을 제지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영국에서는 의회를 ‘팔리아먼트’라고 부르는데 그 어원인 ‘팔라르’는 ‘말한다’는 뜻이다. 그런 만큼 의회는 말하기 위해 마련된 장소로 이해된다. 그래서 그런지 영국에서는 국회의원이 무슨 내용의 발언을 하더라도 이를 존중하고 결코 문제삼지 않는다.

▼정당 소속땐 중재 어려워▼

심지어 명백한 거짓말이나 허위사실을 유포하더라도 사정은 같다. 소위 국회의원의 면책특권 보장이 의회민주주의의 알파요 오메가라고 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국회에서 말하지 못하도록 물리적 강제력을 동원했다고 하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그것도 야당이 그런 물리적 강제력을 동원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야당은 집권세력에 대한 대체 정당으로서의 의의를 지니기 때문에 흔히 그 나라의 정치적 미래라고까지 불린다. 그런데 그런 야당마저 의회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와 행위 규범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 나라의 정치적 미래란 너무나도 뻔한 것이 아니겠는가.

의회의 본질이란 별것이 아니다. 총칼로 싸울 것을 말로 대신하자는 발상에서 시작된 정치적 대화의 창구다. 그런 만큼 상대방이 어처구니없는 발언을 했다면 끝까지 경청하고 왜 그런 발언이 망언인가를 다시 발언을 통해 규명해 주면 그만인 것이다. 그런 정도의 정치적 성숙이나 인격적인 준비가 없으면서 어떻게 나라의 경영을 맡겨달라고 주문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의회민주주의를 보장하는 가장 원초적인 장치는 국회의원 개개인의 도덕적 성찰력과 자기제어력인 셈이다. 그러나 이런 국회의원을 보장해 주지 않는 것이 우리 정치의 현실이다. 그런 만큼 국회의 안전 운항을 보장할 제도적 장치를 모색해 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여권이 고려 중이라는 ‘단상접근금지법’은 그 실효성이 의심스럽다. 이런 법이 제정된다고 하더라도 단상을 점거하고 발언을 방해하는 일이 벌어질 경우 종당에는 국회 윤리위원회가 징계의 수준이나 범위를 정해야 하고 국회의장이 원내 질서 유지권을 발동해야 실질적인 제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이번 사태와 관련한 국회의장의 주문은 매우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다. 국회의장은 여당으로 하여금 자신을 제명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여야 어느 곳으로부터도 편당적이라는 의구심을 사는 한 결코 원내 갈등의 중재자가 될 수 없는 것이 바로 국회의장이다. 여기에 더해 의회민주주의는 혁명이 아니라 점진적인 진화에 의해서만 성장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어떤 사안이 터져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마다 한 가지씩이라도 변화와 개선을 축적해 나가야 우리 정치도 질적인 성장을 약속할 수 있다. 단상접근금지법이 아니라 국회의장의 당적 보유를 금지하는 제도적 장치 모색에 여야가 머리를 맞대야 하겠다.

아울러 국회의장도 이 같은 사태가 재발할 경우 원내 질서유지권을 발동하여 경위로 하여금 발언을 방해하는 국회의원을 강력히 제압하는 조치를 취해야 마땅하다.

▼당적 보유 금지 제도화를▼

이는 국회의장이 걸머지고 있는 책임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권위를 높이는 첩경이고 의회민주주의의 구현을 위한 실천적 대안이기도 하다. 국회의장은 단순한 사회자가 아니라 일종의 사법적 재결권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국회의장의 권한이 힘을 발휘하려면 국회의장에 대한 국회 구성원의 존경과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국회의 국회의장에 대한 정파간 합의와 이해는 너무나도 부족한 것 같다. 국회의장이 되려면 특정 정파의 지지가 관건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단 국회의장에 당선되고 나면 그 순간부터 그는 이미 특정 정파의 소속원이기 이전에 입법부의 수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내 모든 정파에 대한 통괄권을 갖는다. 그런 국회의장을 자기 정당의 소속원으로 보고 관리하거나 통제하려는 발상은 처음부터 삼가야 옳다. 국회의장의 권위를 보호하지 않는 가운데 국회의 순항을 기대하기란 바로 연목구어에 지나지 않는다.

박재창 숙명여대 교수·의회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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