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남찬순]바버라여사의 청와대 만찬

  • 입력 2002년 2월 18일 18시 03분


조지 W 부시 미국대통령의 어머니인 바버라 부시 여사가 1994년에 낸 회고록에는 92년 1월 남편인 조지 부시 대통령과 함께 서울을 공식 방문했을 때의 일화가 한 토막 실려 있다.

“국빈 만찬 때 노태우 대통령은 우리의 47회 결혼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거대한 케이크를 마련했습니다. 내 오른쪽에는 노 대통령이 앉고 왼쪽에는 ○○○○이 앉았습니다. 저는 ○○○○에게 영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그분 말씀이, 아주 정확히 옮기면, ‘당신과 통할 수 없습니다(I can not communicate with you)’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분은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나마 영어를 들은 셈이죠. 다른 만찬 때 만난 저의 한국인 파트너들은 한마디도 영어를 하지 않은 걸로 기억합니다.”(바버라 여사는 물론 ○○○○라는 직함을 명기했다)

바버라 여사 자신도 한국말을 못하는 데다 영어로 말을 걸어오는 사람조차 없으니 무척 답답했던 모양이다. 흔히 경험하는 일이지만 그런 자리에서는 상대방에 대해 여러 가지 상상을 하고 심지어는 오해도 하게 된다.

▼異見 조화 가능한가▼

작년 한해 서울과 워싱턴 사이에는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워싱턴에서는 진작부터 북한의 대량살상무기(WMD)와 재래식 무기, 인권문제를 거론하고 있었는데 한국정부는 오로지 평양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국은 햇볕정책에 귀가 멀었고 미국은 테러문제로 제 정신이 아니었다. 두 나라가 진실하게 의사 소통을 하지 못하고 잠꼬대처럼 외교적 수사만 늘어놓다가 결과적으로 오해와 불신만 쌓이게 된 것이다.

남북한이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하는 등 한반도에 ‘봄바람’이 불고 있던 92년 1월초, 서울에서 노 대통령과 조지 부시 미국대통령이 정상회담을 가질 때도 비슷한 분위기였다. 부시 대통령은 통일이라도 된 듯 들떠 있는 한국정부와는 달리 “종이 위의 약속으로 평화는 지켜질 수 없다”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미국 공화당 행정부의 북한 체제에 대한 적대감은 뿌리가 깊다.

그의 아들인 부시 대통령이 오늘 서울에 온다. 단독 및 확대정상회담 등 4차례나 대좌할 양국정상이 공식적으로 할 얘기들은 당국자들이나 부시 대통령의 방한에 앞선 기자회견 등을 통해 이미 다 나왔다. 양국은 동맹관계를 재확인하면서 더욱 굳건한 공조를 다짐했다고 할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의 WMD에 대한 미국의 비판과 우려에 동의하고 부시 대통령은 한국의 햇볕정책을 지지할 것이다. 두 정상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는 북한이 조속히 대화에 나와야한다고 촉구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뻔한 얘기를 듣고 북한에 대한 양국의 근본적인 이견과 갈등이 치유됐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동포와 민족이라는 혈연적 정의(情誼)와, 이해관계에 민감한 미국의 냉엄한 사고가 조화되기란 근본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미국이 아무리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규정해도 한국정부의 시각은 그게 아니다. 이번 정상회담이 양국의 그 같은 인식 차이를 얼마나 좁힐 수 있을까.

각론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북한과의 대화를 강조하고 있지만 그 대화의 색깔과 내용은 햇볕정책의 대화와 전혀 다르다. 한국은 북한과의 대화 자체만으로도 한반도의 평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제하지만 미국은 대화를 위한 대화는 하지 않겠다고 단언한다. 대화개념에 대한 그 같은 본질적인 차이를 갖고 한미 양국이 어떻게 북한과 대화를 추진하겠다는 건가. 북한의 재래식 군비를 휴전선 뒤로 물리고 인권도 개선해야 한다는 부시 대통령의 주장도 햇볕정책에는 별로 중요한 목록이 아니다. 북한의 WMD문제는 미국이 워낙 목소리를 높이는 바람에 한국정부도 이제 관심을 표명하는 수준이다.

▼공조 '박자' 맞춰라▼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이 한미 양국의 최우선 목표라는 데는 아무 이론이 없다. 그 평화와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두 나라의 동맹과 공조다. 최근의 갈등은 두 정상의 화려한 미소와 악수 그리고 외교적 수사로 일단 가라앉을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논란의 접점이 보이지 않는다. 서로간의 ‘박자’가 이처럼 어긋난 적이 드물다. 이대로 가다가는 굳건한 공조도 동맹도 제대로 될 것 같지 않다.

김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은 어떻게 하든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문제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담판을 지어 일거에 모든 해결책을 강구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밤을 새워서라도 대북정책의 ‘박자’를 맞출 수 있는 충분한 의견교환을 하라는 얘기다. 그런 진솔한 대화만 이뤄져도 이번 정상회담은 성과를 얻은 것으로 평가될 것이다.

남찬순 chans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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