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눈]피터 벡/한반도 평화, 서울-평양에 달렸다

  • 입력 2002년 2월 13일 17시 21분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연두교서를 발표한 이후 워싱턴에서 나오는 수사(修辭)는 부시의 외교안보팀이 북한에 대해 강경한 정책을 취하기로 결정했음을 시사한다.

부시 대통령의 서울 방문이 1주일도 안 남은 지금 한미 정상회담이 외교적 재앙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이 국제적 연대를 추구해 온 것이 제스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점차 분명해지고 있다. 세계에서 악을 제거하겠다는 카우보이식 일방주의(이젠 ‘부시 독트린’이라고 불린다)는 건재하다.

▼대북정책 투명성 갖춰야▼

그러나 부시 대통령은 왜 ‘악의 축’의 첫 번째 국가로 북한을 지목하면서도 북한으로부터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는 동맹인 한국과 일본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은 것일까. 미국은 뭔가 숨겨진 동기가 있을 때를 제외하면 한반도에 대해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북한이 아니라면 부시 행정부는 미사일방어(MD) 체제 구축에 2500억달러를 투입하는 것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인가.

일부에서는 MD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설사 작동하더라도 9·11 테러와 같은 사건으로부터 미국을 보호할 수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북한을 위협하는 것은 미국 내의 스캔들 등에 쏠린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부시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백악관의 고위관료들이 연루돼 있어 미국판 ‘대우 사태’라고도 할 수 있는 엔론사 문제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악의 축’이라는 표현은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구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부른 것을 연상시키지만 레이건 전 대통령은 결코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위협하듯 구 소련을 위협하지는 않았다.

워싱턴의 매파들은 북한에 대한 공격의 결과로 고통을 당할 친척들이 없기 때문에 쉽게 대북 선제공격을 구상할 수 있을 것이다.

부시 행정부는 북한과 언제 어디서든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말하지만 워싱턴에선 아무도 이 말을 믿지 않는다.

한국이 부시 행정부의 강경한 대북접근이 북한과의 갈등을 부를 것이라고 우려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잘 무장된 국가를 궁지에 몰아 넣으면 반발하게 돼 있다. 북한이 외부세계와 체결한 기념비적 협약인 94년 제네바 북-미 합의는 워싱턴에서 전례 없이 위협받고 있다.

일부 의원들은 부시 대통령에게 제네바 합의를 파기하라고 촉구할 태세다. 만일 ‘당근’을 치워버린다면 워싱턴과 서울은 ‘채찍’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고조되는 긴장은 최소한 한국의 취약한 경제회복을 위협하고, 한국이 몹시 필요로 하는 외국인투자를 쫓아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의 정상회담에 거는 기대는 더 할 나위 없이 낮다.

김 대통령은 지난해 3월 워싱턴 한미정상회담 때 겪었던 것과 같은 당혹감을 피하기 위해 애쓰는 듯이 보인다. 부시 대통령은 미 행정부의 강경한 대북정책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한국에 최소한의 지지를 보내는 것처럼 해야 하는 미묘한 과제를 안고 있다.

한국에서 햇볕정책은 북한이 김 대통령의 엄청난 대북지원에 호응하지 않는 바람에 점점 지지도가 떨어지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의 긴장이 비등점 가까이 고조됐던 93년 북핵 위기 때로 돌아가길 원하는 사람이 있을까. 햇볕정책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의 대안은 더욱 위험하다.

이제 모든 한국인들이 지지할 수 있는 접근방식을 찾아야 할 때다.

한국 정부는 워싱턴의 우경화를 대북관계에 대한 새로운 공감대를 형성하는 기회로 삼고, 나아가 상의하달 방식에서 탈피해 보다 투명성을 갖춘 대북정책을 모색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남북 당사자가 해법 모색을▼

만일 워싱턴이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가 된다면 결국 해결책을 찾는 것은 남북한 당사자들의 몫일 것이다.

궁극적으로 평화와 화해는 북한에 달려 있다.

북한은 미국에 대해 욕설을 퍼붓고 벼랑 끝 전술을 펴는 대신 91년 남북기본합의서 체결과 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 그랬던 것처럼 한국이 내미는 우정어린 손을 잡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미국은 남북한의 돌파구 마련과는 별 관계가 없다. 궁극적으론 서울과 평양이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피터 벡 워싱턴 한국경제연구소 국장

beckdonga@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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