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박상섭/외교 볼모로 정치싸움 말라

  • 입력 2002년 2월 7일 18시 17분


1월 29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선과 악 두축 간의 대결’을 골자로 한 세계정책 발표 이후 우리 국내 정치가 더 큰 갈등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듯하다.

국제관계를 선악의 대립이라는 흑백논리로 보는 것은 미국적 선민의식의 발로로 여겨진다. 세계적으로 많은 나라들과 미국 내에서도 강한 반발이 제기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비판이나 반발 못지않게 중요한 점은 거센 반발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굳이 자극적 표현을 통해 전하고자 한 메시지의 내용을 파악하는 일이다. 이미 정답이 주어져 있지만 9·11 테러와 같은 비정규적 폭력사태가 국가 조직의 지원을 통해 기성 국제질서를 교란하는 일은 어떤 수단을 통해서도 막겠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미국은 정규 국가조직에 의해 지원되는 테러 움직임의 실상을 감시할 능력이 있고, 또 필요하다면 실력으로 저지하거나 응징할 의사와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對北정책 심각한 시각 差▼

최근 우리 사회에서 제기되는 비판의 대부분은 부시 미 대통령이 선택한 수사에 쏠린 것으로 보인다. 표면적으로는 선악이라는 지극히 비외교적인 표현에 대한 불쾌감이 표출된 것이다. 그러나 정부와 여당 측에서 제기하는 비판은 그 이상의 당혹감을 반영하는 듯하다. 그 당혹감은 북한을 악의 축에 놓고 보는 부시 대통령의 발언이 거의 현 정부의 존재 의의라고 할 만한 대북 화해 정책의 기조와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에 발생했다. 그 기조란 북한의 정치적 성격에 대한 판단과 관련된다. 한국 정부의 입장은 북한을 대화가 가능한 협상 상대로 보는 반면 미국은 북한과의 의미 있는 대화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대량살상무기 제조와 관련된 북한의 태도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미국은 북한의 대량무기 제조능력이 동북아시아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적인 파장을 갖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북한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바꿀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라크 등 미국 중심의 기존질서에 직접적으로 도전할 의도를 가진 국가들과 무기 공급 등의 문제로 연결되어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이 문제의 해결 이전에는 어떤 대화도 의미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따라서 남북한 간의 의미 있는 대화의 지속은 미국의 세계정책과의 연계 속에서 추진되어야 한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 정부의 입장은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무력이나 무기 생산능력이 남북한 관계보다는 세계정치 수준을 겨냥한 것이기 때문에 미국의 비판적인 북한관은 우리의 대화노력과는 무관한 것이고, 따라서 그 노력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두 가지 입장 사이에는 타협점이 쉽게 발견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이러한 정책갈등의 기본 원인은 북한에 대한 정치적 성격규정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차이가 한미 간뿐만 아니라 국내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대단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그러한 입장 차이가 정권에 대한 지지 여부와 관련해서 갈라지고, 또 그렇게 해석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여기에서 현 정부의 정책방향이 북한에 대한 판단을 바탕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 그 반대가 아니었던가 하는 의심이 생겨난다. 정책방향이 미리 고정되어 있다면 변화하는 정황에 대한 객관적 분석은 별 의미가 없게 된다. 미리 정해진 입장을 비판하는 행위에 대한 대응은 합리적 토론이 아닌, ‘반통일적’ 또는 ‘반민족적’ 등의 선동적 구호의 형식을 띨 수밖에 없다. 자연 미국과의 입장 차이 표출도 쉽게 반미운동의 형식을 취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햇볕' 비판이 反통일인가▼

이러한 사태의 전개를 보면서 흥미롭게, 아니 안타깝게 생각되는 점이 있다면 이 중요한 토론의 전체 과정에서 북한은 빠진 채 그 입장을 누군가 다른 사람이 대변하고 있는 동안 정작 북한은 미국을 상대로 핵 또는 기타 대량 살상무기와 관련해 세계정치 수준에서 거래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우리 외교가 낙후될 수밖에 없는 결정적 이유는 중요한 정책결정 과정이 민족주의 상징물을 주무기로 하는 국내 세력 간의 명분 싸움에 볼모로 잡혀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통일은 물론 우리 민족이 풀어야 할 최대의 과제다. 그것을 제대로 해결하기 위한 첫걸음은 통일이 쉽지 않은 현실적 이유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외면한 채 제기되는 주장은 자기 기만이거나 불순한 의도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기로는 어느 쪽도 마찬가지다.

박상섭 서울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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