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정진영/햇볕정책 집착하더니…

  • 입력 2002년 2월 5일 18시 23분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지목한 연두교서를 발표한 이후 미국 지도부의 대북 강경 발언이 계속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예상외로 빨리 종결지음으로써 자신감을 얻은 미국은 국제 테러리즘에 대한 확전을 선언하고 나섰다. 그리고 2002년을 ‘전쟁의 해’로 선포한 미국의 조준선 상에 드디어 북한이 이라크, 이란과 함께 올라온 것이다.

물론 미국의 대북 강경 발언이 당장 북한에 대한 군사행동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북한의 대응방향과 미국 내 여론의 추이에 따라 북-미 관계의 경색이 장기화하거나 걷잡을 수 없는 위기국면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이러한 상황은 한국 외교의 큰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우리 정부는 미국과 북한 사이의 대화 재개와 이것이 남북관계에 미칠 긍정적 영향을 은근히 기대하며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외교적 낭패 되풀이▼

1년 전에도 우리 외교는 비슷한 낭패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우리 정부는 미국의 미사일 방어망 추진 계획을 모르고 러시아의 주장에 찬동해 탄도탄요격미사일(ABM)조약의 유지를 지지했었다. 그러한 사건이 있은 직후 지난해 3월 워싱턴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은 그러한 해프닝을 해명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왜 이러한 외교적 낭패가 반복되는가. ABM조약 지지 사건과 마찬가지로 이번 미국의 대북 강경 발언도 예상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부시 미 대통령은 취임 이전부터 미사일 방어망 구축의 강행을 선언했었다. 따라서 ABM조약을 폐기하거나 무력화시킬 것이라는 예상이 이미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는 그러한 흐름을 모르거나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미국의 대북 강경 발언도 갑자기 튀어나온 것으로 볼 수 없다. 부시 대통령과 공화당 정부의 주요 인사들은 북한에 대한 깊은 불신을 공공연히 드러냈고, 북한의 대량살상무기와 미사일 개발에 대한 의구심을 계속해서 표출해왔다. 그리고 미국은 이미 올해를 테러에 대한 전쟁의 해로 선포했다. 이번 발언은 이러한 맥락에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발언의 수위를 정확히 예상하지는 못했더라도, 미국이 북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미국의 대북 강경 발언에 충격받고 당황해 하고 있는가.

두 가지 서로 연관된 이유가 있다. 첫째, 햇볕정책에 대한 지나친 집착 때문이다. 햇볕정책은 현 정부의 상표나 마찬가지다. 이러한 햇볕정책을 포기한다거나 중요한 수정을 가한다는 것은 현 정부 하에서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런데 햇볕정책에 대한 이러한 집착은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유연한 대응을 방해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햇볕정책은 북한에 대한 특수한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은 북한이 더 이상 우리의 경쟁상대나 위협이 아니며, 북한의 비정상적인 행동이나 개혁 개방에 대한 거부는 바로 북한의 내적 취약성과 체제붕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최근 신임 통일부 장관이 TV프로에 출연해 북한의 대량살상무기가 남쪽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고 한 발언도 북한에 대한 이러한 인식에 기초한 것이다.

▼한-미 동맹 금가게 해서야▼

둘째, 햇볕정책의 성공에 너무나 집착한 나머지 정부는 희망사항과 현실을 착각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햇볕정책의 성공에 대한 믿음이 햇볕정책에 불리한 현실을 보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북한이 변할 것이라는 생각은 희망사항이고, 북한이 별로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은 현실이다. 북-미 관계의 개선은 희망사항이고, 북한에 대한 미국의 불신과 의구심은 현실이다. 햇볕정책의 성공은 희망사항이고, 햇볕정책이 실패할 수도 있는 것은 현실이다. 외교는 희망사항이 아니라 현실에 기초해서 수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정부가 어떤 정책을 일관성있게 추진하는 것은 바람직할 수 있다. 그러나 대내외적 정책환경의 중요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같은 정책에 너무 집착한다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그러한 집착이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마저 방해한다면 나라를 심각한 곤경에 빠뜨릴 수도 있다. 햇볕정책에 대한 집착이 한미동맹에 금이 가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불확실한 햇볕정책이 한미동맹을 대신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정진영 경희대 교수·국제관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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