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양병기/‘씨족정치’를 하잔 말인가

  • 입력 2002년 1월 20일 17시 39분


황현(黃玹·1855∼1910)은 1910년 한일병합이 되자 이에 항의해 자결한 한말의 재야 사학자였다. 그가 저술한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록이 나온다.

1875년 운양호(雲揚號) 사건을 통해 조선을 위협해 강제 개국시키는데 성공한 일본은 1876년 구로다 기요다카(黑田淸隆) 전권대사를 조선에 보내 강화도에서 수교조약을 체결하게 했다. 이로 인해 당시 조선의 상하 민심은 상당히 어수선했다.

이 때 역시 답답한 심정을 가눌 길 없던 흥선대원군이 마침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8대 후손을 만나 아래와 같이 물었다고 한다.

▼‘가락정권-정부’세우자?▼

“자네는 충무공의 후손이니, 왜놈을 격파할 무슨 좋은 계책이라도 있는가?” 그러자 그 후손이 “대감은 급하게 서두르지 마십시오. 그들을 막기는 아주 쉽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대원군이 다시 “어떤 계책이 있는가”하고 묻자 그 후손은 “충무공의 8대손인 저도 이처럼 못났으니,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임진왜란 때 조선에 쳐들어 온 일본 장수)의 8대손인들 어찌 영특하고 용감하겠습니까”하고 대답했다.

그래서 이 말을 전해들은 사람마다 허리가 끊어지도록 웃었다. 당시 구로다 전권대사가 가토의 8대손이라고 전해졌는데, 충무공의 후손 역시 8대손이었다.

황현은 조선왕조 말기에 이르러 사회지도층이라 할 수 있는 명문 가문의 후손들이 급변하고 있던 대내외적인 상황에 대해 무사안일하고 무책임하게 대응하고 있던 상황을 빗대어 비판한 것이다.

즉, 100여년 전 조선왕조는 안으로는 봉건왕조 체제의 변혁과 바깥으로는 제국주의 외세의 침략이라는 이중적인 역사적 시련에 봉착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황현은 이 충무공의 후손을 예로 들어 지배층의 대응력 미비를 지적했던 것이다.

독자들께서는 이 충무공의 업적과 그 문중을 폄훼하려는 의도가 아님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17일자 동아일보에는 16일 서울 어느 호텔에서 열린 김씨 가락 종친회에서 정치인 출신의 종친회장이 “1997년 우리는 1500년 만에 ‘가락정권, 가락정부’(현재의 대통령과 정부)를 창건했다. 금년 말에도 다시 한번 똘똘 뭉쳐 그 감격과 환희를 재현하자”라고 하면서 어느 정당의 총재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또 장관을 지낸 이 종친회의 어느 명예회장은 “김 대통령과 김 총재 두 분 중 남은 한 분을 지도자로 모셔야 한다. 종친 700만명 중 유권자가 500만명이므로 다른 유권자 한명씩만 껴안아도 1000만 표”라고 하며 기립박수를 제의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기사가 사실이 아닌 오보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 기사가 사실이라면 다음과 같이 평가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어느 집안 문중에서 한 국가의 지도자를 배출하는 것은 당연히 그 집안 문중의 명예이자 영광이며 후손들에게도 커다란 긍지와 교훈이 될 것이다. 필자와 이 기사를 읽고 문제의식을 느낀 독자들도 이 점에 대해서는 모두 공감하리라 믿는다. 또한, 이 종친회 모임에서의 일부 인사의 문제 발언이 물론 종친회 전체의 견해가 아니라는 것은 안다.

▼역사의식-정치의식 뒷걸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기할 수 있는 문제는 첫째, 종친회의 대표성을 띠며 사회의 지도층에 있는 인사들이 한 발언이기에 사회의 따가운 시선이 모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1500년 만의 가락정권의 재현과 그를 위한 문중 지지표의 결속’을 주장하는 데에서처럼, 문제 발언의 내용에서 감지되는 역사의식과 정치의식의 퇴행성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인류의 역사는 씨족사회를 거쳐 국가로 발전해 왔고 최근에는 유럽연합(EU)에서처럼 지역국가간의 연합공동체를 추구하는 움직임으로도 발전하고 있다. 또한 세계화라는 화두 속에 지구공동체가 논의되고 있는 시대다.

이러한 때 씨족사회에서 족장을 선출하는 식의 발언이 국민의 납득과 지지를 받겠는가라고 반문하고 싶은 것이다.

따라서, 한국국민의 높아진 정치의식의 수준과 정치발전을 바라는 여망을 감안한다면, 사회지도층의 발언 역시 역사 발전에 부응하는 정치의식을 기반으로 하여 신중하고 책임감이 뒤따라야 한다고 본다.

양 병 기 청주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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