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포커스]"유로화 더이상 아름다울 수 없다"

  • 입력 2002년 1월 16일 17시 31분


《“돈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1월1일부터 유럽 12개국에서 쓰이는 유로화를 손에 쥔 사람들이 한결같이 내뱉는 감탄사다. 유럽의 역사와 전통 조형미학이 지폐와 동전 안에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이다. ‘대량생산된 시각예술품’이란 찬사를 듣기도 한다.

‘유로랜드’ 12개국은 돈에다 경제의 힘뿐만 아니라 문화의 저력까지 담은 것이다. 한국은행 이정식 발권국장은 이에 대해 “돈의 도안에는 역사와 가치관이 스며 있으며 그 사회의 심미(審美)적 평균치가 드러나기도 하는 것”이라면서 유로화를 그 대표적인 예로 꼽았다.》

▽돈은 문화를 담고 있다〓미국 달러화는 디자인 측면에서는 매우 낙후한 수준(조병수 전 한은 화폐디자이너)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김광현 한양대 교수(디자인대·한은 화폐도안자문위원)는 “사실 대부분 국가의 화폐 디자인이 그리 뛰어나지 못한 편”이라며 “이에 비해 유로지폐는 상징성도 뛰어나지만 무엇보다 조형적 완성도가 충격적인 수준”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가 분석한 유로화의 특징은 △지면이 기능적으로 공간분할돼 있고 △단순 간결한 현대적 디자인을 택하면서도 △그 특징만 추출반복함으로써 지루함을 완화했으며 △중간색을 써 시각적 부담을 덜고 품격을 높였다는 것.

클라라 슈만, 생 텍쥐페리, 지그문트 프로이트, 카라바지오, 퀴리 부인, 에펠, 세잔….

유럽 각국의 구권(舊券)에 그려졌던 위인들이다. 이들은 유로화의 등장으로 화폐에서 퇴장했다. 유럽중앙은행(ECB)이 특정국 이미지를 연상시킬 수 있는 인물을 유로지폐에서 배제키로 한 것이다.

▽유로화는 돈 디자인의 명작〓유로지폐 앞면에는 문 또는 창문이 그려져 있다. 건축용어로 개구부(開口部)라 불리는 구조. 뒷면에는 다리(橋) 그림이다. ECB는 “문은 개방과 협력의 정신을, 다리는 유럽인 사이의, 또 유럽과 비유럽의 커뮤니케이션을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이들 그림은 권종마다 각각 다른 시대를 표현한다. 5, 10, 20, 50, 100, 200, 500유로권에 각각 그리스 로마양식,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철과 유리 시대, 포스트모던(post-modern)한 현대의 건축양식이 형상화돼 있는 것. 건축의 흐름을 통시적(通時的)으로 전개함으로써 인류문화의 진화와 축적을 묘사하고 있다. 지폐 크기도 신용카드 2개를 합친 것보다 조금 더 클 정도로 아담하다. 위조를 막기 위해 오른 편에 넣은 홀로그램은 환상적인 빛을 내뿜는다.

발행국마다 뒷면 문양을 달리하고 있는 유로화 동전의 도안은 나라별 우열의 진폭이 크지만 공예품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애쓴 노력은 엿보인다는 평가.

▽원화의 미술적 수준은?〓우리 돈은 어느 정도 수준일까. 현재 자기 고유화폐를 사용하는 나라는 120여개국으로 이 가운데 자기 돈을 직접 생산하는 곳은 20여개국에 불과하다. 한국조폐공사는 지난해 외국돈을 찍어 2500만달러를 벌어들일 정도.

우리 지폐에서는 세종대왕과 물시계, 율곡과 벼루, 퇴계와 향로 등 한국적 이미지를 상징하는 모티브를 다양하게 담고 있다. 그러나 디자인의 상징성 간결성 현대성 측면에서는 아쉬움이 있는 것도 사실. 또 ‘권위주의 국가일수록 지폐 크기가 크다’는 속설이 있는데 한국 지폐에도 그 잔재가 남아 크기가 엄청나게 큰 편이다. 동전에는 학 쌀 다보탑 등이 부조돼있다.

김 교수는 “문양이 지나치게 복잡하고 인물 표정이 딱딱한 것이 흠”이라며 “전통에 대한 자부심을 현대적 표현으로 재해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충고했다.

미술비평가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이렇게 말했다. “참신한 눈으로 작품을 보고 그 작품 속에서 새로운 발견의 항해를 감행한다는 것은 어렵지만 값진 일이다. 우리가 그 여행에서 무엇을 얻어 돌아올지는 누구도 예견할 수 없다.”

반복되는 일상에도 미학적 고려를 담는 여유가 필요하다는 충고로 해석할 수 있을까?

허승호기자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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