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영이/고이즈미의 ‘깜짝쇼’

  • 입력 2002년 1월 15일 18시 11분


“함께 행동하고 함께 발전하는 솔직한 파트너 관계를 쌓자는 나의 제안에 각국 정상들이 이해를 적극 표명했다.”

일주일간의 동남아 5개국 순방을 마치고 15일 귀국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는 방문 성과에 대해 만족스러운 듯이 이처럼 말했다. 이번 순방에서 그는 동남아국가연합(ASEAN)을 ‘동반자’로 격상시키고 자유무역협정(FTA)을 포함한 경제제휴협정을 제안했다. 또 ASEAN뿐만 아니라 한국 중국 뉴질랜드 호주 등과 함께 ‘동아시아 확대 공동체’를 만들자고 제창했다.

일본 언론들은 고이즈미 총리가 동아시아 외교로 눈을 돌린 것을 평가하며 순방결과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평소 ‘친미’ 성향으로 알려진 그가 뒤늦게 아시아 중시 전략으로 전환한 것은 물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다.

중국이 지난해 말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계기로 ASEAN과 10년 내에 FTA를 체결하기로 합의하는 등 영향력을 강화하기 시작하자 일본에서는 동아시아에서의 주도권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높아진 것.

투자확대 등 대규모 경제지원을 앞세워 부랴부랴 외교공세에 나선 일본 측은 “ASEAN도 중국의 경제적 팽창을 두려워하며 일본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언뜻 보면 일본이 중국과 서구 열강으로부터 아시아를 구한다며 침략을 정당화했던 20세기 초와 비슷한 인식이다.

마하티르 모하마드 말레이시아 총리 등은 일본의 제의를 반가워하기보다는 일본의 엔저(低) 용인에 강한 불만을 표명했다. 일본이 미래의 ‘뜬구름 잡는 일’보다는 당장 주변국 경제를 망치는 엔저정책부터 바꾸라는 뜻이었다.주룽지(朱鎔基) 중국 총리는 수년간 빈번하게 ASEAN 각국을 방문하며 경제협력 토대를 쌓는 데 공을 들여왔다. 역사교과서 왜곡 파문,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 등으로 주변국과 외교마찰까지 불사했던 일본이 갑자기 아시아에 미소를 보이며 협조를 구하는 것은 낯간지러운 느낌마저 든다.

일본이 진정한 동아시아 공동체를 원한다면 경제력을 내세운 ‘깜짝쇼’보다는 평소의 신뢰구축이 전제돼야 하지 않을까.

이영이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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