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불멸의 화가 아르테미시아'

  • 입력 2001년 12월 14일 18시 11분


◇ 불멸의 화가 아르테미시아/알렉상드라 라피에르 지음/563쪽 민음사

알렉상드라 라피에르의 ‘불멸의 화가 아르테미시아’라는 아름답고도 매혹적인, 위험하고도 생생한 이 책은 남성중심주의 역사속에서 상실되고 매몰되어왔던 ‘여성 이야기’의 재발견이라는 커다란 페미니즘적 틀 안에서 출발한다. 페미니즘 창작 영역 중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 중의 하나가 인식되지 못하고 상실되어온 여성들의 이야기, 그녀들의 항변, 남성 못지 않은 놀라운 창조성 등을 재발견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르테미시아는 라파엘로, 루벤스,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등 남성 지배적인 17세기의 미술계에서 남자 예술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견주고 왕성한 활동을 했던, 17세기 바로크 미술을 대표한, 그러나 오랫동안 남성중심주의의 미술사에서는 잊혀져 왔던 ‘레테 속의 여성 화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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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라피에르는 1970년대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열린 ‘1550∼1959년의 여성 미술가’라는 전시회에서 그녀의 놀랍도록 아름다운 그림을 본 다음 그 눈부신 천재성에 매료되어 남성중심의 ‘미술사의 레테’ 속에서 잊혀져 있는 그녀를 살려내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5년여에 걸쳐 로마, 베네치아, 피렌체 등 그녀의 역사와 지문이 찍힌 길들을 찾아 다니며 생애 기록과 작품들을 찾았고 풍부한 상상력으로 그녀의 생애를 재구성했다. 그리하여 이 책은 전기(傳記)와 소설의 ‘사이 공간’에 위치한다.

아르테미시아는 1593년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화가 오라치오 젠텔레스키의 딸로 태어나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이탈리아 대가들의 작품을 구경하러 다녔고 아버지의 화실에서 본격적인 그림 수업을 받았다. 열두살에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의 감시와 훈련 속에 자라난 그녀는 열일곱의 나이에 ‘수산나와 두 늙은이’라는 아주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림을 아버지와 함께 그려 재능을 펼쳐 보였으나 열여덟살 때 아버지의 친구이자 화가인, 아내 살해와 근친상간 추문에 휘말려있던 아고스티노 타시에게 강간을 당하게 된다. 강간 문제로 소송과 법정 공방을 이끌어 가는 동안 그녀는 남성 파시즘과 욕망에 대해 눈을 뜨게 되고 또한 세간에는 아버지의 재능을 능가하는 그녀의 천재성이 알려지게 된다. 아버지는 딸의 압도적인 재능에 대한 공포를 품게된다.

지참금을 받고 그녀의 부정한 과거를 눈감아 주기로 하고 한 무능하고 낭비벽이 있는 화가 피에트로와의 결혼, 아버지의 공포와 심리적 박해 등의 갈등으로 그녀는 25년 간이나 아버지 오라치오와 헤어져 살게된다. 그녀는 피렌체에서 코시모 2세 드 메디치, 마리 드 메디치, 갈릴레오, 갈릴레이, 알카라 공작 등 명문 귀족들과 왕가의 후원을 받고 역동적으로 활동하면서 이탈리아 화가 협회인 디세뇨 한림원에 가입하게 된다. 아무리 뛰어난 여자라도 동업자 남편의 동의없이는 어떤 활동도 허가되지 않았던 당시에 아르테미시아가 직업 화가로서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다는 것은 어떤 폭력에 의해서도 파괴될 수 없는 그녀의 역동적인 생명력과 비범한 천재성을 알 수 있게한다.

1652년 늙고 기력이 쇠해진 채 그리니치 궁전의 천장 벽화를 그리고 있던 아버지 오라치오는 그때서야 딸을 부른다. 몇번이나 등을 돌리기만 했던 아버지의 부름에 따라 아르테미시아는 그리니치 궁으로 가서 형편없이 제작되고 있던 천장 벽화를 자신의 손으로 완성한다. 그 작품의 완성은 아버지와 딸의 길고긴 사랑과 경쟁, 공포와 애증의 시간들이 불멸의 예술로 승화된 지점이 된다. 아버지의 성대한 장례식을 끝으로 둘 사이의 애증의 역사는 감동적인 예술의 화음으로 막을 내린다.

무엇보다도 아르테미시아의 그림들은 잔혹하고도 아름답고 전율적으로 생생하다. 성서의 모티브를 차용하여 참혹하게 남자의 목을 칼로 잘라내고 있는 여자를 그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나 잘라낸 남자의 목을 바구니에 담고 칼을 어깨에 메고있는 여자들을 그린 ‘홀로페르네스 참수 후의 유디트와 그 하녀’ 등은 강간당했던 자신의 경험과 그 공포 속에 솟구친 남성 살해 욕망, 엽기, 죄악, 환상 등의 전복적 힘을 보여준다. 또한 이 책의 번역자이자 재능있는 소설가인 함정임이 아르테미시아의 흔적들을 따라 로마에서 피렌체로 방황하고 다닌 미적, 심리적 기행문이 실려있어 이 작품의 이해에 더욱 풍부한 금빛 채광을 더해준다.

김승희(서강대 국문학과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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