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동서양 사상의 권력관계 재조명 '서양과 동양이…'

  • 입력 2001년 11월 30일 17시 47분


첫 기획회의부터 마지막 대담까지 127일. 다섯 차례의 직접 대담 총 30여 시간, 네 차례의 개별 인터뷰 총 8시간, 대담 현장 사진 800여 컷, 동영상 10시간, 대담 녹음 테이프 120분짜리 15개, 주고 받은 e메일 210여 통, 녹취 원고 2010장.

한 사람의 동양철학자와 한 사람의 서양철학자가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이를 글로 풀어 책으로 엮은 과정은 이렇게 명료하게 계량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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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에 익숙지 않고 대담집이 잘 읽히지 않는 우리의 문화 풍토 속에서 새로운 형식의 책을 기획하고 만들어 낸,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이 책에는 동양철학을 전공한 한국인과 서양철학을 전공한 한국인이 만나 동양과 서양을 이야기하는 색다른 만남이 담겨 있다.

이들은 주저주저하며 만났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동양’과 ‘서양’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에 겹겹이 싸인 한국 사회의 지식인임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자신을 상대에게, 그리고 서로를 세상 사람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장시간의 공개 대담에 나설 경우 부담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양과 서양의 이분법, 서양에 대한 피해의식과 열등감, 동양인 또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존심 등 이 땅에서 ‘동양’과 ‘서양’을 함께 떠올릴 때 동반되는 여러 ‘짐’들이 이들에게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고심 끝에 대담을 결심한 이들이 이번 책을 통해 얻은 것은 오랜만에 보는 한국 지식인의 논(論)과 쟁(爭)이었다.

이들은 처음부터 ‘동양’ ‘서양’이라는 단어를 매우 부담스러워했다. 사실 ‘동양’과 ‘서양’은 서양인들이 둥근 지구를 자기중심적 관점에서 지역적 문화적으로 절단해 놓은 가상적 개념일 뿐이다.

“출판사로부터 대담 제의를 받고 나서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른 것은 동양과 서양을 분리해 놓고 담론을 벌인다든지, 동 서양을 비교하는 것은 버추얼 리얼리티(가상 현실)적이라는 생각이었어요. 그러니까 허상인 것 같지만 사실은 허상이면서 실효를 주는 뭐 그런 것 말입니다.”(김용석)

“동아시아라는 문명 단위는 제국주의 시대의 유럽 중심주의와 2차대전 후 미국 일본의 헤게모니의 장악을 통해 만들어진 ‘인위적 고안’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동양, 동아시아, 아시아, 태평양 권역 등의 ‘심상지리학’ 개념에 감추어진 헤게모니의 구도에 일차적으로 주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이승환)

서양철학의 학문 전통 속에 있는 사람(김용석)은 ‘동양’과 ‘서양’의 ‘일상적 어법’을 인정하며 두 개념을 편의상으로라도 받아들이는 데 반해, 동양철학의 전통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한 사람(이승환)은 ‘동양’과 ‘서양’의 구도를 집요하게 깨려 한다. 이는 현대사에서 패배자들의 정신적 뿌리로 폄훼돼 온 동양철학 연구자의 생존본능적 공격성 때문일지 모른다.

두 사람의 생각 차이는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의 차이에만 있지 않았다. 그동안 공부해온 과정과 배경이 크게 달랐다.

한 사람(김용석)은 이탈리아에서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해 그곳에서 대학교수로 지내다가 귀국해 현재 대학 밖에서 집필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또 한 사람(이승환)은 국내 대학에서 철학과를 졸업한 후 대만대를 거쳐 미국 하와이대에서 중국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지금은 국내 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인문학과 철학이 소홀히 되는 현실을 개탄하며 지식정보시대, 빠른 변화의 시대에 논리적 사고와 철학적 상상력의 교육이 절실하다는 데는 목소리를 같이하면서도, 동서양과 그 사상을 보는 시각은 서로 날을 세우고 있었다.

서양철학자는 서양사상의 특징으로 ‘지(知)에 대한 열렬한 사랑’ ‘형이상학적 상상력’ ‘패러독스’를 제시했고, 동양철학자는 동양사상의 특징으로 ‘공동체주의’ ‘욕망의 절제를 통한 인격의 완성’ ‘물질적 가치뿐만 아니라 다양하고 고양된 가치의 추구’를 들었다. 이들은 두 사상의 특징이 서로에게 공유되는 지점과 불일치하는 지점을 들춰내며 철학의 기원부터 현재의 한국사회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엮어갔다.

이들은 책을 함께 만들면서 상대방의 분야에 대해 마음의 창을 열었다. 하지만 이는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동양과 서양사상이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의 시작일 뿐이다. 마지막 대담이 끝난 후 이들은 10년쯤 지난 후 다시 대담을 갖자고 약속했다. 그 무렵이면 한국사회에서 논쟁과 대담집의 문화가 좀 더 풍성해지기를 기원하며.

<김형찬기자>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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