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박재창/DJ ‘국정원 개혁’ 나서라

  • 입력 2001년 11월 20일 18시 44분


소금이 썩었다. 흔히 이 세상 모두가 썩어도 결코 부패해서는 안 되는 곳이 썩었을 때를 일컫는 말이다. 윤리적 한계영역이라고 해야 할 종교계, 교육계, 언론계, 법조계를 비롯해 검찰과 경찰 같은 사정기관이 부패할 경우 그 역기능이 사회체계 유지에 치명적이거나 부패의 근절이 사실상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쓰는 표현이다.

▼각종 부패사건 연루▼

국가정보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국정원은 국가 안보와 국내외 정보 수집 및 분석을 주임무로 삼기 때문에 사실상 사정기관을 사찰하는 기능까지 수행한다.

그런 기관의 고위간부가 부패 게이트에 연루되었다고 한다면 이는 보통 일이 아니다.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고양이를 지키라고 특별히 고용한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차지한 꼴이다. 더욱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그런 패륜적 고양이를 고발하고 징계해야 할 검찰마저 한통속이었다는 냄새가 적잖이 난다는 데 있다. 이 나라의 양대 사정기구가 함께 어우러져 부패를 눈감아주거나 봐주기로 일관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나라에는 희망이 없다.

특히 직접적인 지휘라인에 있는 고위 간부 여러 명이 이런저런 일로 부패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은 이번 일이 단순히 개인 차원의 도덕적 해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단체 부패에 가깝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 실제로 이들은 학연 지연 등으로 끈끈한 비리와 비호의 네트워크를 형성해 왔다. ‘기관 내의 기관’을 구축해 온 셈이다. 가장 객관적인 기준과 냉철한 소명의식으로 무장돼 있어야 할 기관이 파당 짓기와 권력집중에 빠져 내홍과 갈등을 거듭해 왔다는 얘기다.

나라의 안전보장과 정보관리를 최종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곳이 이런 상태에 빠져 있다면 나라의 안전이 어떻게 보장될 수 있겠는가. 국정원은 고도의 기밀을 다루기 때문에 외부의 통제가 사실상 불가능한 곳이다. 그런 만큼 그 어느 곳보다도 소속 직원의 소명의식과 자긍심을 강조하는 곳이기도 하다. 개인의 직업윤리나 자기성찰 없이는 기관의 존립 자체가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 곳이 부패와 내홍에 빠졌으니 정권이 위태로운 것이 아니라 나라가 위태로운 것은 당연한 이치다.

한때 이 무소불위의 정보기관이 국가안보에 앞서 정권안보를 우선시한다는 점이 문제되었던 때가 있었다. 사찰 기능보다 동원 기능에 치중한 나머지 정치공작이나 국정관리의 지휘자 역을 자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는 집권세력의 직할체제하에 있었기 때문인지 기관 차원의 도덕적 해이나 직업윤리의 실종이 문제되지는 않았다. 적어도 익명성과 기밀유지를 생명으로 삼는 복무규범이 훼손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바로 이 점에 착안해 보면 지금 국정원이 앓고 있는 병은 기관 지휘부의 지도력과 관리능력 실종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평가해 볼 수 있다.

그런데 국정원은 대표적인 대통령 직속기관이다. 그런 기관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이 모든 흠이 대통령의 정치적 부담으로 고스란히 떠넘겨지게 될 것은 당연한 이치다. 사람을 잘못 썼거나 기관운영의 원칙이나 목표가 잘못 설정되었던 것은 아니냐는 의구심이 제기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적 쇄신만이 기관 정상화를 약속하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적 쇄신 절실▼

그러나 더 근원적인 문제는 국정원이 과거의 안보 우선 기관에서 생활정보 우선주의로 선회하면서 단순히 정보의 수집이나 분석에 그치지 않고 사실상 정책을 개발하고 제시하게 된 데에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실질적인 정책결정권을 행사하는 곳이 외부로 노출될 경우 그곳을 대상으로 정책 이해당사자들이 적극적인 로비활동에 나설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부패와 작당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도 물론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볼 때 국정원 개혁은 단순히 인적 쇄신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더욱 근본적인 기관 구조의 안전성 진단이 선행되어야 한다. 명예와 직업윤리를 생명처럼 중시하는 기관문화의 구축을 보장하는 기관 내부구조가 재건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일은 기관의 특성상 대통령의 결단 없이는 불가능한 과제이기도 하다. 대통령의 사심 없는 결단을 기대해 본다.

박재창(숙명여대 교수·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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