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고승철/들어라 펀더멘털리스트들아

  • 입력 2001년 11월 18일 18시 26분


주자 가례(朱子 家禮)에 따라 대부분 국민이 제사를 지내는 나라. 몇 천년 전 이방(異邦)에서 건너 온 여러 종교가 번성하고 있는 곳. 마르크스의 환영(幻影)이 아직도 한반도 38도선 이북에 남아 있는 땅. 바로 한국이다.

이런 모습이 때때로 외국인 눈에는 이상하게 비친다. 바깥에서 들어온 이데올로기가 발상지보다 더욱 강렬하게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 한국인들을 펀더멘털리스트(fundamentalist·원리주의자)로 보는 외국인도 적잖다. 펀더멘털리스트는 ‘고집 불통의 벽창호’란 뉘앙스를 담고 있는 말이다.

이집트는 어떤가. 일부 이슬람원리주의자들이 피라미드를 구경하러 온 관광객들에게 가끔 테러를 가한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 한동안 관광객 수가 급감한다. 결국 이집트는 관광수입이 줄어들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는다.

한국 경제가 선진권을 향해 달려나가는 데 발목을 잡는 원리주의자들이 수두룩하다. 대표적인 정부부처가 공정거래위원회다. 이들의 눈엔 기업이 문어발 확장을 일삼아 늘 철저히 감시해야 할 ‘믿지 못할’ 대상으로 보인다. 정부가 손대지 않으면 끝없이 일탈(逸脫)하는 문제아로 비친다. 기업을 바라볼 때 효율성보다는 선악(善惡)을 따지는 듯하다.

최근 발표한 대기업집단 정책개선 방안을 살펴보자. 30대 그룹을 지정하는 제도를 내년 4월부터 없애겠다는 것이다. 마치 규제를 크게 풀어주는 것 같지만 사실상 규제기준이 기업 순위에서 규모로 바뀐 데 불과하다. 자산 규모 2조원 이상인 47개 기업에 대해선 상호출자 및 채무보증을 금지한다고 하므로 규제대상이 오히려 늘어났다.

물론 계열사끼리 무분별하게 상호출자해서 그룹 전체가 부실덩어리가 되는 것을 막자는 취지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정부 규제로 안전판이 생겨 발생하는 이익보다는 이 규제 때문에 기업활동이 위축돼 생기는 손실이 더 클 것으로 보이는 점이 문제다.

다른 회사에 출자할 수 있는 한도를 순자산의 25%까지만으로 제한하는 제도도 그렇다. 취지는 그럴싸하지만 합작경영, 공동출자, 인수합병(M&A) 등을 통해 급변하는 환경에 발빠르게 대응해야 하는 기업들에 걸림돌이 된다. 이 제도가 강행되면 외국기업이 한국 알짜기업을 손쉽게 인수하는 데 도움을 줄뿐이다.

한국의 기업 가운데 덩치 키우기에 몰두하다 쓰러진 곳이 어디 한둘인가. 빚을 메우느라 공적자금까지 끌어 써 국민 대다수에게 피해를 준 기업들도 숱하다. 이를 막기 위해 대기업 규제정책이 필요했었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세상이 크게 바뀌었다. 기업 스스로 이익 위주, 핵심역량 위주로 경영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더욱 큼직한 양두구육식 족쇄를 채우려 하니 이것을 발목에 차고 달리는 한국기업들은 쌩쌩 달리는 외국업체와 경쟁을 벌일 수 있을까.

미국 월스트리트저널과 헤리티지재단(www.heritage.org)이 최근 발표한 ‘2002년 경제자유지수(IEF)’에 따르면 한국은 세계 156개국 가운데 지난해 29위에서 올해 38위로 처졌다. 올해엔 94년 이후 자유도가 가장 낮은 것으로 평가됐다. 정부가 기업활동 곳곳에 입김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신념은 고결하지만 도그마(dogma)는 위험하다. 펀더멘털리스트들은 이 점을 깨달아야 한다.

<고승철 경제부장>che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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