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 월드]9·11테러후 달라진 ‘적과 동지’

  • 입력 2001년 11월 16일 18시 43분


테러와의 전쟁 이후 미국의 외교전선에 큰 변화가 일고 있다.

달라진 국제질서 속에서 ‘적’과 ‘동지’의 기준이 급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사회를 구분하는 단층선이 과거 냉전시대에는 동양과 서양,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지형적 이념적 이분법에 근거했으나 테러 전쟁 이후에는 경제적으로 ‘성공한 나라들’과 ‘실패한 나라들’로 갈리고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는 ‘성공한 나라들’을 더욱 부강하게 했지만 미국의 지배에 분노하는 국가나 사람들에게는 더 잦은 테러의 빌미를 주고 있다.

미국 외교전선의 변화는 러시아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먼저 나타나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미국의 관심은 러시아의 핵미사일 위협에 쏠려 있었고 아프가니스탄은 미국인들의 관심권 밖에 있는 국가였다. 그러나 이제 아프가니스탄은 테러리즘의 본거지이자, 탈 냉전 이후 세계의 안보를 관리할 미국의 힘과 역량을 시험받는 곳으로 부상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러시아는 미국이 테러 빈곤 인종갈등 등의 새로운 국제문제들을 함께 논의해야 할 파트너가 되고 있다.

미국이 15일 끝난 러시아와의 정상회담에서 미사일방어(MD)체제를 강하게 밀어붙이지 않은 것은 신(新) 미-러시대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

9·11 테러 이후 달라진 미국 외교의 환경과 서서히 윤곽을 잡아가기 시작하는 미국의 정책적 대응을 크게 4가지로 나눠 정리해 본다.

▼“테러국가의 적은 모두 아군”▼

◆‘일방주의’서 전환=취임 초기 ‘일방주의(Unilateralism)’ 비난을 감수하며 미사일방어(MD)체제 구축, 유엔기후협약 비준 거부 등의 정책을 밀고 나갔던 조지 W 부시 미국 행정부는 테러참사 이후 성공적인 전쟁을 위한 외교적 동맹과 연합을 강조하는 모습으로 변모했다.

‘다변주의(Multilateralism)’로 선회한 미국의 외교정책은 최근 폐막된 미-러 정상회담에서 러시아를 ‘새로운 동반자이자 우방’으로 천명하고 러시아측이 주장해 온 전략핵무기 감축에 전격 합의한 것에 잘 나타나 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15일 “미국이 아프간 접경국인 러시아의 대 테러전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해 탄도탄요격미사일(ABM) 협정 조율에 실패하면서까지 러시아의 요구를 들어준 것은 매우 놀라운 정책 변화”라면서 “이는 ‘나의 적의 적은 친구’라는 오랜 외교원칙이 적용된 좋은 예”라고 분석했다.

▼사우디등 對美관계 냉담 긴장▼

◆중동정책 변화하나=테러 사태를 계기로 걸프전이후 미국의 가장 강력한 아랍 동맹국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에 대한 미국의 외교적 영향력은 크게 축소됐다.

지난달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이 대 테러전 협조를 위해 사우디를 방문했을 때 사우디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

오사마 빈 라덴의 출생지이자 아랍권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에서는 최근 재정적자로 인한 경제위기설로 인해 집권 정부에 대한 지지도가 크게 떨어지고 있으며 이슬람 과격주의의 세력이 급속히 확대되고 있다.

이집트에서도 친미주의는 자취를 감추고 있다. 93년 이집트 성직자 오마르 압델 라흐만이 세계무역센터(WTC)를 폭파했을 때 국민들이 암묵적 지지를 보냈던 이집트는 테러사태 이후 무바라크 정권에 대해 대미관계에 일정 거리를 두라는 압력이 거세지고 있다.

▼유라시아지역 미군주둔 추진▼

◆전략거점 지역 전환=아프가니스탄 사태를 계기로 유라시아가 새로운 전략거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유라시아 지역에 있는 체첸과 그루지야는 카스피해 석유관을 통해 유럽으로 수출하기 위해서는 꼭 통과해야 하는 요충지. 러시아는 전세계 이목이 아프가니스탄에 집중돼 있는 틈을 타 체첸에 군사작전을 강화하고 체첸 인접국인 그루지야에 군사적 기반을 남겨두려는 압력을 확대하고 있다.

반면 미국도 대 테러 전쟁을 계기로 유라시아에 대한 군사 주둔을 강화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최근 수년간 유라시아 지역에 대한 미국의 경제지원 확대를 우려해온 러시아는 이 지역에서 미국이 군사적 영향력까지 확대하고 있는 것을 매우 우려하고 있다. 국제정치 전문가들은 “유라시아의 전략적 흐름이라는 점에서 보면 아프간 사태는 분수령과 같은 사건”이라고 지적했다.

▼이라크-수단등 ‘불량국가’타킷▼

◆美, 제재확대 하나=이른바 ‘불량국가들’과의 관계가 미국 외교의 새로운 화두가 되고 있다. 아프간 전쟁도 크게 보면 같은 맥락이다. 미국이 아프간에 이어 빈 라덴과 알카에다의 전략 거점으로 알려진 이라크 소말리아 수단 등 중동의 ‘불량국가들’에 대한 제재로까지 전선을 넓혀갈 것인지 가, 아니면 다른 수단을 동원해 이들의 일탈행동을 억지할 수 있을 것인지가 향후 국제질서의 안정을 담보하는데 핵심 변수의 하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불량국가들’에로 전선을 확대할 경우 국제적으로 전쟁에 대한 회의론도 확산될 것으로 보이지만 미 국내에서의 부시 정부에 대한 지지도는 오히려 높아질 것이란 전망도 있다. 특히 내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있는 부시 대통령으로선 어떤 경우든 ‘불량국가들’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강경한 입장을 견지할 것이란 관측이 유력하다.

▼전문가 분석▼

▽마이클 만델바움 외교위원회(CFR) 분석가〓“21세기 새로운 국제질서 속에서 러시아는 더 이상 초강대국은 아니지만 주요 참여자인 것만은 분명하다. 미국이 우려하고 있는 불량국가들은 대부분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점에서 러시아의 중요성은 과거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미국이 관심을 쏟고 있는 외교 안보상의 문제는 모두 러시아로 통한다. 러시아와의 동맹 구축이 필요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테리 다이벨 워싱턴 국가안보대학 교수〓“미국이 전개하고 있는 테러와의 전쟁은 냉전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렇지만 미국의 안보를 송두리째 위협하는 ‘적’이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냉전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냉전시대가 끝난 이후 미국은 외교안보 정책의 근간이 되는 새로운 핵심 구성원칙을 찾아왔다. 미국이 현재 전개하고 있는 테러와의 전쟁은 그 같은 원칙을 제공해주고 있다.”

<정미경기자>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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