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아리미쓰 겐/고이즈미 방한때 ‘사죄’ 요구해야

  • 입력 2001년 10월 13일 18시 29분


교과서 문제와 야스쿠니신사 참배 등의 문제로 한일관계가 최악인 상태에서 이뤄지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15일 방한에 한국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문제의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교과서가 거의 채택되지 않았다고 해서 한국에서는 안도하는 분위기가 있는 모양인데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지금 일본 국민의 관심은 미국의 테러사건과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군사행동, 자위대의 해외 파병에 집중돼 있다. 그렇다고 불과 몇달 전 큰 소동을 일으킨 역사인식의 문제가 다음 번 교과서 검정 때까지 일단락된 것일까? ‘새로운 전쟁’을 외치는 지금이야말로 ‘이전의 전쟁’ 처리를 무한정 방치해온 일본의 태만에 대해 문제삼아야 하지 않을까?

가장 큰 문제는 일본이 확실한 ‘사죄’를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 정부는 국내에서는 ‘사과와 반성’이라고 하면서, 해외에서는 ‘apology(사죄)’라고 번역해 사죄했다고 선전하고 있다. 영어로 ‘apology’를 쓰려면 일본어도 ‘사죄(謝罪)’라고 해야 한다. 1998년 10월 한일공동선언의 일본어 문장은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과’였지만, 한국어로는 ‘사죄’로 번역됐다. 일본 외무성은 ‘한국측이 마음대로 그렇게 번역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커다란 어긋남과 속임수가 있다.

한국측은 한일공동선언으로 일본이 깊이 반성하고 이후 역사 문제로 양국이 삐걱거리는 일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일본 시민단체들도 그렇게 기대하고 공동선언을 환영했다. 그러나 한일공동선언이 발표된 날 일본 신문들의 제목은 ‘과거 일단락 짓고 미래 지향’ 일변도였다. 일본 독자들은 ‘이것으로 역사 문제는 끝났으며 이제 한국에서 과거 청산을 요구받는 일은 없다’고 믿게 됐다. 한국은 한국대로 ‘이것으로 드디어 일본도 바뀌었다’고 믿고 역사인식을 둘러싼 불협화음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안도한 것은 아닐까?

역사학자 운노 후쿠주(海野福壽)는 이런 사태를 예견하고 역사인식 결말론에 반대하면서 ‘사죄에 걸맞은 보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 뒤의 경과는 대강 운노씨가 우려한 대로 됐다.

교과서 문제와 일본측의 오만함은 바로 한일공동선언에서 유래했다. 공동선언에 반대할 생각은 없다. 책임은 선언의 실질화를 꾀하지 않은 일본측에 있다. 다만 한국측도 지나치게 미래만 강조한 측면이 있다. 과거도 미래도 모두 중요하다고 선언했어야 했다. 쌍방이 각각 다른 방향으로 안심한 결과, 불과 2년 만에 무참하게 배신당한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의 방한이 한일공동선언의 되풀이에 그쳐서는 안 된다. 일본의 성실한 ‘사죄’ 표명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보상이 없는 한 신뢰관계의 회복은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측은 그것을 분명히 요구해야 한다.

만약 한일공동선언을 방패로 고이즈미 총리가 사죄를 거부한다면 선언을 파기하는 편이 좋다. 과거에 대한 반성에 입각해 일본 총리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 사려 깊게 생각하기 바란다.

아리미쓰 겐(전후보상 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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