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아의 책 사람 세상]이슬람에 대해 너무나 무지한 우리

  • 입력 2001년 10월 12일 18시 37분


미국 테러 이후 이슬람 문명권에 대한 호기심이 높아가고 있다. 대형 서점에서는 아예 이슬람 관련 코너를 따로 만들었다.

하지만 국내에 거주하는 아랍계 사람들과 무슬림 신자에게는 편견에 찬 눈길이 쏟아진다. 이 두 가지 다 이슬람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현상이라는 생각을 하면, 우리가 미국과 서유럽 이외의 ‘다른 곳’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무지했던가 하고 새삼 놀라게 된다.

‘이슬람’하면 생각나는 것은 무엇일까?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란 세대는 노란 터번을 머리에 두르고 곡도(曲刀)를 든 채 주인공에게 속아넘어가 펄펄 뛰는 야만인을 연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 ‘이슬람’은 문학으로 먼저 다가왔다. 중학교 시절 뜻도 모르고 읽은 오마르 카이얌의 ‘루바이야트’(민음사·2000)는 포도주와 사막의 이슬, 풍성한 잔치와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이미지를 선사해 주었다. 관능적이고 탐미적인 시구들이 사춘기의 정서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일까. 이슬람의 첫 이미지는 아름다움과 덧없음이었다.

생각해 보면 서양 고전들 중에서 이슬람의 그림자가 드리운 작품들은 적지 않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오셀로’(민음사·2001)의 주인공 오셀로는 무어인이었고, 보카치오의 ‘데카메론’(범우사·2000)의 몇몇 일화들에서도 이슬람의 군주 살라딘은 영명하고 지혜로운 인물로 등장한다.

세르반테스는 ‘돈 끼호테’(범우사·1999)의 저자가 사실은 아라비아인이라는, 허구 속의 허구를 내세운다. 당시 아라비아가 풍요와 신비, 신기한 문물이 넘쳐흐르는 곳으로 여겨졌던 것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이슬람 문명이 상상력의 원천 노릇을 하는 것은 현대에 와서도 마찬가지이다. SF의 기념비적 위치를 차지하는 프랭크 허버트의 ‘듄’(황금가지·2001)에서, 서양인들이 본 아랍인들의 이미지는 모래 행성 듄에 사는 ‘프레멘’이라는 신비스러운 외계종족의 모습에 투영되어 있다. 이쯤되면 도대체 왜 서구인들은 끊임없이 이슬람 문명에 매혹되면서도 그 문명을 적대하지 못해 안달을 하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세계 정세와 경제의 복잡한 역학 때문에 우리가 미국의 전쟁을 도와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이슬람의 이미지를 팍스 아메리카나에 반기를 드는 말썽 많은 폭도 정도로 단순화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들에게도 삶과 종교와 문화가 있다는 것을 이해할 때, 세계를 남과 나로 딱 잘라버리는 전쟁이 가져오는 인간성의 파괴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인간성의 파괴 말이다. 송경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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