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이종찬/테러응징 편승 日 재무장 경계해야

  • 입력 2001년 10월 7일 18시 37분


6·25전쟁 당시 유엔군과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을 때 미국의 일부 인사는 일본 자위대를 재무장해 한국에 파견하는 방안을 고려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만약 일본군이 한반도에 발을 들여놓으면 전선에 있는 국군을 빼돌려 일본군과 일전을 벌이겠다고 엄포를 놓아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미국 테러참사 이후 가장 서두르는 나라는 일본이다. 물론 이번 테러로 일본인도 많이 희생됐다. 또 아랍권에서 수송되는 원유가 없으면 일본의 에너지 자원은 큰 위협을 받을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생존에 필수적인 해상항로를 확보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일본이 자위대 파병을 서두르고 있는 이유가 이것뿐일까.

일본의 자위대 파병은 명분이 무엇이든 무력행사 금지와 전수방위를 명시한 일본 헌법에 정면 배치된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헌법 정신을 왜곡 해석하려 하면서 내심 개헌까지 준비하고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는 자민당 총재 선거 과정에서 이미 ‘야스쿠니(靖國)신사 공식 참배론’과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개헌이나 헌법의 유권해석 변경’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더욱이 테러 응징 파병에 일본 국민의 70%가 지지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나왔다.

반면 한일간에는 역사교과서 왜곡을 둘러싸고 팽팽한 기류가 가시지 않고 있는 상태다. 역사교과서 자체보다도 근본적으로는 일본의 반성이 없는 자세가 언제든지 아시아에서 새로운 긴장을 조성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지금 호기를 맞은 셈이다. 들끓는 테러 응징 분위기에 편승해 역사교과서 문제로 수세에 몰린 여론을 반전시키며 자위대 해외 파병까지 기정 사실화하려 하고 있다. 다음 단계는 헌법 개정이 될 것이다.

한국은 여기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지금과 같은 대일 자세로는 어림도 없다. 역사교과서에 항의하는 국민여론은 이미 시들해졌다. 우리가 진정으로 대일 자세를 정립하려면 자위대 해외파병에 대한 분명한 입장부터 정리해야 한다.

한국과 아시아의 여러 나라는 아직 일본이 자위대를 해외에 파병할 때가 되지 않았다고 본다. 일본의 무장 확대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동북아에서 자칫 중국과 군비경쟁을 촉발할 수 있는 무장 확대는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동북아는 지금 어느 정도 평형을 유지하며 각국이 경제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깨는 일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

일본은 경제대국을 넘어서 세계 강국의 반열에 들어서기에는 준비가 덜 된 나라다. 사람마다 인격이 있듯이 일본의 국격(國格)이 이에 못 미치기 때문이다. 일본은 세계평화를 위해 무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강대국이 되기 위해 무장을 가속화하려 한다는 오해를 불식시키지 못하고 있다.

한국도 역사교과서 왜곡에는 강력히 대응하면서 저류에 흐르는 일본의 진짜 의도, 즉 재무장을 서두르는 문제를 간과하는 근시안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극일(克日)을 할 수 있다.

이 종 찬(전 국가정보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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