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병종/타인의 비극

  • 입력 2001년 9월 23일 18시 44분


맨해튼의 거대한 쌍둥이 빌딩이 검은 버섯구름 속에 내려앉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영화 같은 그 현실의 상황 앞에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앞으로 어떤 테러영화가 나온다 한들 실제 벌어진 그 상황보다 더 충격적이고 더 끔찍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런데 서글픈 것은 그 충격적이고도 끔찍한 장면들도 거듭해서 바라보는 중에 차츰 무뎌지고 둔감해져 간다는 사실이다. 정말 영화 속의 한 장면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무디어짐 속에는 그것이 나와는 관계없는 남의 나라 사건일 뿐이라는 이기심과 무관심이 도사리고 있다. 그 사실을 엊그제 지하철 안에서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일부러 들으려 한 것도 아닌데 내가 앉은 좌석 좌우에서 승객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20대의 두 청년은 빌딩을 향해 돌진하는 비행기의 각도가 기가 막히더라는 둥 마치 무슨 할리우드 테러 영화를 보고 난 듯 미국의 참사를 이야기했다. 또 다른 두 명의 중년 여인은 그 사건 때문에 갖고 있는 부동산 가격이 폭락했다는 것과 실기(失機)하여 주식을 내다 팔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저만치에서 다른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런데 아프가니스탄이 어디 있는 거야?”

▷이번 미국의 재난은 시시각각 또 다른 재난을 예고하고 있다. 눈물을 삼키며 촛불 예배를 드리던 미국인들의 모습과 겹쳐 퀭한 눈망울의 아프가니스탄 아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누가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다. 재난의 불길은 지구촌 전체로 확산될 조짐을 점점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가끔 TV에서 ‘동물의 왕국’같은 프로를 볼라치면 초원에서 한가하게 풀을 뜯는 얼룩말이나 사슴을 사자 같은 맹수가 공격해 순식간에 물어뜯어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면 혼비백산 흩어졌던 얼룩말이나 사슴은 잠시 후 언제 맹수의 공격이 있었느냐는 듯 다시 모여 한가하게 풀을 뜯고 있는 것이다. 우리 역시 비극은 늘 타인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격에 무디어져 불구경하는 구경꾼 같은 입장에 머무르게 되는 현실이 서글프기만 하다.

김병종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교수·화가)kimbyu@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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