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경남]거창 한센병村 어쩌나…언제 쫓겨날지 몰라

  • 입력 2001년 9월 19일 22시 09분


“정부에 여러차례 탄원서를 냈지만 허사였습니다. 마을이 모두 남의 손에 넘어가면 우리는 어디에서 살아야 합니까.”

경남 거창군청에서 경북 김천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 차편으로 5분 정도 거리인 거창읍 대동리 동산마을. 양지바른 9300여평에 자리잡은 한센병(일명 음성 나병) 환자 자활촌이다.

추석을 10여일 앞둔 이 마을에 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무거운 침묵이 짓누르는 가운데 한숨소리만 가득하다. 90여명의 주민들은 “언제 쫓겨날지 몰라 하루하루 불안하게 살아간다”고 입을 모은다.

평화롭던 이 마을에 어둠의 그림자가 덮친 것은 97년 초. 주민들은 “당시 마을 대표이던 A씨가 돈을 불릴 생각으로 마을 소유 부동산 일부를 팔고 다른데서 끌어온 돈을 합쳐 4억여원을 B씨에게 빌려주었다가 몽땅 날렸다”고 말했다. A씨는 얼마뒤 마을을 떠났다.

IMF(국제통화기금)의 찬바람도 이 마을을 비껴가지는 않았다. 계란값 등이 절반가량으로 폭락했다. 33가구 주민의 80%가 양계, 20%가 돼지를 기르고 있어 타격이 컸다. 설상가상으로 주민들이 계란을 납품했던 중간상인은 2억원짜리 어음을 부도내고 종적을 감췄다. 외상으로 사료를 사와야 했고, 빚을 내 빚을 갚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마을 주민들이 만든 ‘거창농원 축산조합’ 명의나 부동산을 담보로 낸 빚은 15%가 넘는 연체이자가 붙으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나 사료회사의 11억원 등 모두 30여억원. 주민끼리 서로 보증을 서는 바람에 압류당하지 않은 부동산은 거의 없다.

주민 박모씨(60)는 “우리가 할수 있는 일은 마을 교회에서 울며 기도하는 것 뿐”이라고 말했다.

농축협과 사료회사 등 채권자들은 지난해부터 재산을 처분해서라도 빚을 회수하겠다며 경매를 진행시키고 있다. 올들어 신모씨(70)의 양계장 등 3건의 부동산이 남의 손에 넘어갔다.

40년 넘게 일군 보금자리를 송두리째 잃게된 주민들은 백방으로 탄원서를 냈다. 거창군 등이 중재에 나서 일부 채권자들은 경매를 연기해 주기도 했으나 문제는 그대로 남아있다.

얼마전에는 위기의식을 느낀 주민들이 ‘생존권을 위협하는 경매를 중단하라’는 등의 현수막을 마을 곳곳에 내걸기도 했었다.

“이곳에 들어오기전 우리의 근거지는 거창 공설운동장 인근 다리 밑이었다”고 회고한 이모씨(70)는 “문전걸식하며 눈물겹게 모은 돈으로 조성한 생활터전이 모두 날아갈 판”이라고 한숨지었다.

마을대표 정모씨(60)는 “장기 저리로 자금만 융자해 준다면 모든 것을 정리하고 새출발을 할 수 있다”며 대책마련을 호소했다.

‘민주도정실현 경남도민 모임’ 대표인 거창군 선거관리위원회 석종근 지도계장(41)은 “부채의 일차적 책임은 주민들에게 있지만 상대적으로 어려운 여건에 있는 한센병 환자들의 문제는 사회복지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며 “정부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경남도와 거창군 관계자는 “안타깝지만 자연재해가 아닐 경우 행정적으로 직접 지원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거창〓강정훈기자>man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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