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하승호/美언론은 너무도 차분했다

  • 입력 2001년 9월 19일 19시 21분


한순간 세계를 경악과 탄식 속에 몰아 넣은 테러사건이 일어난 지 일주일이 넘었다. 17일 뉴욕 월가의 주식시장이 다시 문을 열었고 맨해튼의 교통도 완벽하진 않지만 정상을 찾아가고 있다. 그러나 뉴욕 시민들의 놀라움과 경악은 점차 탄식과 진한 슬픔 속으로 젖어드는 것 같다. 맨해튼 곳곳의 소방서와 경찰서 앞에는 긴급구조를 위해 출동했다가 사망한 대원들의 사진과 시민들이 가져다 놓은 수많은 꽃과 촛불이 행인들을 숙연하게 만들고 있다.

희생자들에 대한 슬픔과 테러범을 향한 분노로 심리적 혼돈 상태가 지속되는 가운데서도 놀랍도록 경탄스럽고 부러운 것은 침착하고 합리적인 상황대처 능력과 여론몰이나 마녀사냥식 선정주의에 빠지지 않고 냉정을 유지하며 사태를 보도하는 메이저 언론사들의 보도 태도다.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의 모든 메이저 TV들은 즉시 상업방송을 중단하고 ‘Attack America’라는 타이틀 아래 긴급뉴스를 보도하기 시작했다. 일주일이 지났지만 아직도 일체의 상업방송과 광고를 중단한 채 사건 관련 보도와 특별기획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다.

사건 직후 뉴욕시민을 포함한 전세계인들에게 가장 궁금했던 것은 테러범이 누구이며 사망자는 몇 명이냐였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루 24시간 계속되는 사건 관련 보도에서 사상자에 대한 추측보도는 전혀 없었다. 루돌프 줄리아니 뉴욕시장은 기자회견에서 “사상자 수를 얼마로 예상하는가”라는 질문에 “지금은 희생자 수를 셀 때가 아니고 얼마나 많은 생존자와 부상자를 구출하느냐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때”라고 답변했다.

평소 상업주의와 선정주의 때문에 비난받아온 메이저 TV들도 줄리아니 시장과 똑같은 메시지를 계속 내보냈다. 그들은 테러의 주체와 배후에 대해서도 조심스럽게 가능성을 비쳤을 뿐 어떤 추측기사나 책임공방도 없이 하나같이 사태 극복과 구조활동에 방송의 대부분을 할애할 뿐이었다.

회사 문을 일찍 닫고 집에 돌아와 온종일 TV 앞에서 지낸 필자는 그들의 보도 태도를 보면서 사망자 수에 대한 호기심과 중앙정보국(CIA), 연방수사국(FBI)에 대한 문책 등에 관심을 쏟았던 나 자신의 얄팍한 정서가 부끄러웠다.

사태 발생 일주일 만인 17일 NBC방송과 월스트리트저널이 공동조사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사 대상자의 62%가 테러범을 응징하기 위한 보복전쟁을 지지한다고 응답했다. 그러나 그들의 92%는 확실한 대상이 밝혀질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려야 한다고 답변했다. 뉴욕타임스의 여론조사 결과도 61%가 보복 대상이 불확실하다고 지적했고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마저 보이지 않는 적과의 전쟁임을 실토했다.

전쟁이 일촉즉발의 분위기로 치닫고 있으나 경악과 분노, 비탄과 슬픔 속에서도 본말이 왜곡될 만한 흥분에 휩싸이지 않고 사태의 본질 파악과 그 해결을 위해 냉정하고 합리적으로 대처하는 미국 언론의 자세는 참으로 부러운 것이었다. 그들의 정신이 살아있는 한 뉴욕은 슬픔과 비탄을 딛고 일어나 새롭게 전진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승호(전 뉴욕 미주동아일보 사장)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