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식의 과학생각]상상의 동물 해태 잊혀지나

  • 입력 2001년 8월 8일 18시 43분


모든 사라지는 것은 늘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한국 프로야구의 명문 해태 타이거즈가 18번의 한국시리즈에서 9번이나 우승한 기록을 역사에 남긴 채 간판을 내렸다. 해태가 수립한 각종 기록은 이를 인수한 기아 타이거즈에 의해 승계되므로 다행스럽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는 거의 유일한 상상동물인 해태마저 망각 속으로 사라질 것 같아 아쉽기 그지없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고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 전시회에 가보면 상상(想像)동물이 새겨진 항아리들이 눈길을 끈다. 그리스 신화의 상상동물들은 아테네의 영웅들과 함께 등장하기 마련이다. 날개 달린 말인 페가수스는 괴물 키마이라를 물리친 영웅 벨레로폰의 뒤에 서 있다. 키마이라는 사자의 머리, 염소의 몸통, 뱀의 꼬리가 합쳐진 괴물이다.

다른 항아리에는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공격하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 미노타우로스는 사람의 몸에 황소의 머리와 어깨가 달려 있는 괴물이다. 그리스 최대의 영웅 헤라클레스 역시 히드라와 케르베로스를 물리친 무용담으로 유명하다. 히드라는 머리가 여러 개 달린 물뱀이며, 케르베로스는 지옥의 문을 지키는 개다.

서양의 상상동물은 로마의 학자인 플리니우스가 펴낸 ‘박물지’에 집대성되어 있다. 박물학의 보고로 평가되는 이 책에는 살라만드라(불도마뱀), 바실리스크, 유니콘(일각수) 따위의 갖가지 상상동물의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수록돼 있다. 동양에도 중국의 ‘산해경’과 ‘태평광기’처럼 상상동물이 소개된 저서가 없지 않다.

중국의 대표적인 신화집인 ‘산해경’을 읽고 있노라면 상상을 초월하는 괴물 이야기를 통해 옛 중국인들의 상상력이 얼마나 기상천외한 것이었는가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송나라 때 황제의 칙명에 따라 설화를 모아 편찬한 ‘태평광기’에도 상상동물이 소개되어 있다.

동서양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상상동물도 적지 않다. 예컨대 인어는 ‘박물지’에는 물론이고 ‘산해경’과 ‘태평광기’에도 등장한다. ‘산해경’에는 사람의 얼굴을 가진 물고기인 능어와 적유가 묘사돼 있다. ‘박물지’에도 스페인 남부 해안에서 목욕하던 인어가 슬픈 노래를 불렀다는 기록이 나온다.

용은 서양에서 언제나 사악한 짐승으로 간주된 반면 동양에서는 은혜가 깊은 존재로 여겨진다. 용은 중국에서 봉황 기린 거북과 함께 네 가지 신비동물로 꼽힌다. 봉황은 서양의 피닉스에 해당하는 불사조이며, 기린(아프리카에 많은 기린이 아닌 상상동물)은 서양의 유니콘처럼 일각수이다. 이처럼 동서양의 신화나 전설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상상동물이 출몰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쇠를 먹고 악몽을 쫓는다는 불가사리와 해태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만한 상상동물을 찾아보기 어렵다. 기껏해야 호랑이 곰 여우 등 동물에 얽힌 설화가 전해지고 있을 따름이다.

해태는 시비와 선악을 판단할 줄 안다는 동물이다. 중국 고서인 ‘이물지’에 따르면 해태는 사자와 비슷하게 생긴 일각수이다. 중국에서는 초나라 때부터 해태를 행정과 사법의 이상적인 상징으로 삼아 궁궐 문 앞에 세워두고 본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도 대사헌의 관복을 장식하는 표장에 해태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다.

해태 석상은 서울의 한복판인 광화문 앞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마당 초입에 서 있는 것이 유명하다. 광화문에 해태상이 놓여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명이 있다. 하나는 해태가 바른 정치를 상징하는 동물이므로 경복궁의 근정전 돌계단에 해태상을 설치해 놓은 것처럼 광화문 정문 양쪽에 세워둠으로써 벼슬아치들로 하여금 마음가짐을 바로잡게 하려고 했다는 주장이다. 다른 하나는 고종 때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잦은 화재가 발생하자 관악산이 휴화산이므로 그 불기가 화재의 빌미라는 풍수지리설의 처방에 따라 광화문에 해태 석상을 세워 관악산의 불기운을 삼키도록 했다는 속설이 전승되고 있다.

1975년부터 포도주 100병이 국회의사당의 해태상 밑 땅속에 묻혀 숙성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해태상과 포도주를 기증한 기업이 해태 타이거즈를 매각한 구단주라고 하니 괜스레 한숨이 나온다.

이인식(과학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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