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차병직/그들은 왜 단식을 택했나

  • 입력 2001년 8월 7일 18시 27분


성경 어딘가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단식을 할 때 얼굴에 기색을 드러내지 말아라. 표시가 나지 않게 얼굴을 씻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라. 그러나 그런 단식은 어쩐지 지금 현실과는 좀 거리가 있는 평화롭고 한가로운 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에서 가끔 행해지거나 요구되는 단식은 참회나 단순한 고통의 분담을 위한 것도 아니고, 건강이나 미용효과를 노리는 것도 아니다. 과거 비민주적 사회 여건 때문에 불가능하게 여겨졌던 옳은 일들이 구태의연한 수구적 비난이나 편의적 공권력 행사에 의해 가로막힐 때 행해지는 단식은 사정이 다르다. 이 때의 단식은 투쟁의 수단이다. 그 목적은 당연한 권리의 획득으로 기대되는 평화다.

지난 겨울 혹한의 서울 명동성당 들머리에서는 개혁입법을 요구하는 인권 활동가들의 단식이 있었는데, 이 여름의 폭염 아래에서는 노동기본권 보장을 위한 1인 단식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 1년여 동안 레미콘 운송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설립을 법률적으로 도와주던 김칠준 변호사가 절망의 표시로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 자리를 틀고 16일간 단식했다.

지난주부터는 그 취지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매일 릴레이식으로 1인 단식을 이어가고 있다. 물론 그 앞뒤에는 건설산업연맹 위원장과 건설운송노조 조합원 50명의 단식도 함께 행해졌다. 투쟁에는 관심이 없고 평화만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태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망치를 휘둘러 노동자의 차량 항의농성을 강제해산시킨 경찰의 모습만 보도됐지, 그 사연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레미콘 노동자들은 지난해 9월 40개 사업장과 70개 분회를 토대로 전국건설운송노조를 설립했다. 그러나 사용자들은 이를 거부했다. 사용자 단체인 한국레미콘공업협회와 한국레미콘공업협동조합연합회가 세 차례나 단체교섭 요청에 불응한 것이다. 명목상 이유는 개별적으로 도급 형식의 계약을 맺고 있는 레미콘 운전기사들은 노동조합을 설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건설운송노조의 질의에 대해 노동부는 사용과 종속 관계가 안정되면 노동관계법상의 근로자로 봐야 한다고 유권해석을 내렸다. 서울지방노동위원회도 같은 논리로 노조 설립을 이유로 한 해고는 부당하므로 해고된 노조원들을 복직시키라고 결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용자들은 승복하지 않고 오히려 4월 노동자들의 노조활동을 금지시켜 달라는 가처분신청을 했다. 이에 인천지방법원은 사용자들의 청구를 기각하면서 노동조합의 합법성을 확인시켜주었다.

이 정도의 경위라면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레미콘 트럭 운전기사도 노동조합을 설립하고 활동할 자격이 있느냐에 대한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의 분쟁이 적법한 절차에 따라 해결된 것이다. 그것도 노동위원회와 노동부와 법원이 번갈아 가며 같은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결과는 놀랍게도 그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 500여명이 해고당하고, 70여명이 고소당하고, 50여명은 재산을 가압류당했다. 가정과 생계를 담보로 한 투쟁에서는 이겼으나 얻은 것은 상처뿐인 셈이다. 사용자들은 여전히 요지부동으로 노조 활동을 방해하는 행위를 권리로 여기고 있다.

노동자와 변호사는 사용자들의 부당노동행위를 고소했다. 그 사례는 100건이 훨씬 넘는다. 일부 사례에 대해선 노동부마저 처벌해 달라는 의견을 냈다. 그러나 검찰은 어쩐 일인지 사용자들을 닮아가며 그 막강한 수사권을 발동하려 하지 않는다. 노조활동금지 가처분 사건이 상급심에서 확정되지 않았다는 애매한 이유로 말끝을 흐린다.

이 지경에서 단식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제도가 허용하는 모든 수단을 통해 주장이 받아들여졌는데도 권리는 실현되지 않는다. 레미콘 트럭을 부수던 공권력은 법원의 결정을 애써 외면한다.

그래서 제도권 밖에서 항의할 길을 찾아 마지막 수단을 선택한 것이다. 평화로운 단식은 개인의 덕행으로 은밀하게 가능하지만, 투쟁으로서의 단식은 사회적 의무감으로 결행되는 것이어서 드러내 놓고 굶는 것이다.

차병직(이화여대 대우교수·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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