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쟁점토론]사후피임약 시판

  • 입력 2001년 8월 3일 18시 13분


《성관계를 가진 후 복용하면 임신을 막을 수 있는 사후피임약 노레보정의 판매 허용 여부를 둘러싸고 찬반 양론이 팽팽하게 맞서 있다. 찬성측은 장애인, 청소년의 원하지 않는 임신이나 강간에 의한 임신의 우려가 있을 때 제한적으로 이 약을 사용함으로써 낙태를 막을 수 있으며 이미 많은 선진국에서 이 약을 사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종교계와 여성부 등 반대측은 정자와 난자가 수정된 순간부터 생명체이기 때문에 수정란의 자궁 착상을 막는 것은 피임이 아니라 사실상 낙태이며 사후 피임약이 보편화할 경우 성도덕이 더욱 문란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찬성/원하지 않는 임신 예방▼

사후 피임약의 시판을 둘러싼 논란은 이 약의 사용 대상자를 각기 달리 설정하기 때문에 야기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사후 피임약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이 약의 사용자를 보호가 필요한 특수대상에 한정하여 사용하는 것을 찬성하는 것이며, 반대하는 사람들은 일반인들이 이 약을 사용하였을 때 나타나는 문제들을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찬성하는 사람들은 여성, 장애인, 청소년들이 강제나 폭력에 의하여 성관계를 갖고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할 우려가 있을 때 전문의의 통제에 따라 이 약을 사용하자는 것이다. 이에 비해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 약의 보편적 사용으로 인해서 야기될 수 있는 생명존중 사상의 훼손, 성 문란, 약의 오남용 등을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약은 현재 세계보건기구(WHO)와 세계가족연맹 등에서도 사용을 인정하고 있다. 특히 WHO는 이 약이 임신을 방해하는 낙태약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미국에서는 이 약이 매년 170만명의 원하지 않는 임신을 막고 있으며 80만건의 낙태시술을 방지하는데 기여하고 있다고 한다. 이 약은 안전하고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증명돼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도 이 약을 승인하였다. 또한 약 처방에 대한 적절한 홍보를 통해서 수시로 복용했을 경우에는 효과가 떨어진다는 사실을 명시함으로써 일반여성의 남용을 막고 있다.

우리는 미국 등과 같이 일반인에게까지 모두 허용하자는 것이 아니고 위기 상황에 있는 대상에게만 한정해서 사용하자는 것이다. 2000년도 성폭력 범죄는 1995년에 비해 60% 이상 증가한 1만건에 이르고 있고, 10대 임신경험자 중 다수는 합법 또는 불법적인 낙태를 선택하고 있는 실정이다. 매년 낙태시술이 100만건 이상 이루어진다는 보고도 있다.

각종 수치에서 알 수 있듯이 성폭력이나 강간 등 성범죄의 증가는 원하지 않는 임신을 증가시켜 사회적 약자일 수밖에 없는 여성에게 심각한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특히 본인의 의지로 피임을 하거나 성폭력에 대처하기에는 힘이 부족한 장애여성이나, 10대

청소년들은 원하지 않는 임신에 더욱 많이 노출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들에게 생명을 존중하라고 요구하기에는 턱없이 사회적 지원이 부족한 게 사실이므로, 성폭력 등으로 인해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한 여성에게 사후 피임약은 인생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절박한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 논의해야 할 일은 먼저 특수대상층이 적시에 이 약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면서 동시에 일반인이 손쉽게 구하지 못하도록 하는 통제방법을 강구하는 일이다. 아울러 이 약의 시판을 계기로 일반인들에게 생명존중의 사상을 강조하고 성문화를 바로잡고 약물 오남용을 방지하는 방안을 강구하는 일이다. 양측 모두 서로의 주장을 존중하여 생명존중 이상도 실현하면서 동시에 당면한 사회문제도 해결하는 현명한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

김성이(청소년보호위원장)

▼반대/사실상 낙태 허용하는 셈▼

현재 논란의 대상이 돼 있는 사후 피임약은 여성의 몸 안에 있는 황체 호르몬과 같은 성분의 합성 레보노르게스테렐 0.75㎎(노레보정)이다. 이 약은 배란기에 성관계를 한 뒤 72시간 내에 12시간 간격으로 한 알씩 2회 복용하면 원하지 않는 임신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

여성들이 그동안 끔찍하게 여겼던 낙태 수술을 이와 같이 손쉬운 방법으로 대신할 수 있는 약이라면 이보다 반가운 소식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약은 엄격히 말하면 피임의 한 방법이라기보다는 약을 사용하는 낙태의 한 방법이다. 이 약의 작용 원리는 난자와 정자가 만나 수정된 후 이 수정란이 자궁 안에 착상이 이뤄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정란은 모든 인간과 똑같이 46개의 독특하고 개별적인 염색체를 가지고 있고, 이 세포로부터 배아-태아-신생아로 성장한다.

따라서 우리 몸을 구성하는 다른 세포와 같은 단순한 세포가 아니라 그 자체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아야 한다. 실제로 최근 미국 하원과 한국의 생명윤리위원회에서도 수정란(넓은 의미에서 배아라고도 한다) 단계에서부터 생명이라고 간주해 모든 배아의 복제나 배아의 간세포 추출 연구를 금지한다고 결정한 바 있다.

또한 이 약을 시판해 사용을 허가한다고 해서 많은 여성들이 실제로 낙태 수술을 면할 수 있는 것인지도 의문이다. 많은 여성들이 낙태를 하는 주요 이유는 이용 가능한 손쉬운 피임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피임을 하려는 의지가 부족하거나, 정확한 피임 방법을 제대로 모르거나, 피임에 실패한 경우이거나, 남녀 관계를 쉽게 생각하는 풍조 등 때문이다. 따라서 사후 피임약이 모든 낙태를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또한 연구자에 따라 결과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이 약의 성공률은 약 75%라고 하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즉, 이 약을 복용하더라도 4명 중 1명은 임신상태가 지속돼 결국 낙태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약이 보편화되면 그동안 임신의 두려움 때문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피임을 하거나, 성관계 자체를 자제해온 사람들이 그러한 긴장감에서 해방됨으로써 무분별한 성행위를 조장해 성도덕이 더욱 문란해질 수 있으며, 결국 원치 않는 임신이 증가할 수 있다는 우려마저 있다는 점이다. 더불어 콘돔 등 피임기구의 사용을 기피하게 됨으로써 에이즈 등 성병이 만연할 수도 있으리라고 예상된다.

따라서 약 사용상의 간편성만을 고려해 청소년을 포함한 많은 국민에게 이 약을 널리 배포하려는 정부의 의도는 사회적 부작용이나 파장을 고려하지 않은 탁상행정이라고 보인다. 이러한 사후 방책보다는 청소년을 포함한 모든 가임기 여성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성교육, 피임 방법의 홍보, 혼전 순결교육 등 사전(事前) 임신 예방사업에 더욱 초점을 맞춰야 한다.

박성철(한일병원 산부인과 과장, 낙태반대운동연합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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