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사랑의 의미 다룬 철학 소설 '은밀한 생'

  • 입력 2001년 7월 27일 18시 47분


◆ '은밀한 생'/파스칼 카냐르 지음/484쪽 9500원 문학과지성사

사랑이 요즘처럼 사회로부터 천대받았던 적이 있었을까. 어느 사이에 사랑은 이 시대의 가장 불온한 단어가 되어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프랑스의 대표작가인 파스칼 키냐르(53)의 ‘은밀한 생’은 아주 도발적인 불온서적이다. 작가는 450쪽에 이르는 두툼한 책에서 오로지 사랑만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로 짐작되는 남자가 첼로 교습을 받던 중 여선생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얼핏 내비쳤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글을 소설로 치부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그보다는 이 책은 동서고금을 넘나들며 사랑의 의미를 천착하는 철학서에 가깝다.

사랑의 담론은 근래 우리 문단에서 부동의 독자층을 확보했지만 대부분 유치한 아포리즘과 유행가에도 못 미치는 시에 불과하다. 파스칼 키냐르도 53장으로 나눈 단장의 글에서 적지 않은 아포리즘을 구사했지만 그것은 한 입에 떠먹을 수 있을 정도로 녹록하지 않다.

그리스어, 라틴어에 능한 고전 철학자이며 첼로 연주자인 작가가 들려주는 말은 감상적 연애시에 길든 독자라면 범접하지 못할 깊이와 울림을 지니고 있다. 화석언어의 전문가답게 그가 골라 사용하는 단어에는 수천년간 축적된 의미가 스며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그는 “사랑은 반사회적이다” “사회는 사랑을 거부한다”란 주제를 일관되게 주장하며 열정, 욕망, 매혹, 성, 육체 등 사랑에 가깝지만 구별되는 주제를 분석한다. 사랑이 반사회적이므로 사회적 약속인 언어가 사랑에 우호적일 리 없다.

그래서 “연인들은 기호보다는 상징에 지배”되며 사랑을 연주하는 악기는 침묵이라는 커다란 공명관을 필요로 한다. 텅 빈 공간, 그 침묵이 깊고 넓어야만 사랑이 제대로 전달될 수 있다. 첼로의 음색이 깊은 것은 커다란 울림통, 그 빈 공간 때문임을 그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소설가가 이야기꾼의 역할을 마다하고 철학에 침잠하는 것이 근래 프랑스 문단의 큰 줄기이며 그 맨 앞자리에 파스칼 키냐르가 있다. 그의 작품이 어렵고, 비관적이고, 시대착오적으로 보이는 것은 고전문학과 음악에 대한 그의 집착이 남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역자의 표현대로 독서, 사랑, 음악으로만 연명하는 사람에게 현 시대는 썩은 물에 떠다니는 쓰레기처럼 보일 것이다.

책을 읽으며 저자보다 역자가 자꾸 떠올랐다. 앞서 말했듯이 그의 작품에서 사용된 단어 하나 하나에는 그 어원적 의미가 동반된 떨림이 스며있다. 프랑스 독자라면 그만의 언어를 일상적 프랑스어로 풀어 읽겠지만 다시 우리말에서 그것의 등가물을 찾는 삼중고를 자임한 역자는 얼마나 고생했을까. 송의경 옮김, 원제 ‘Vie Secr`ete’(1998년)

이재룡(문학평론가·숭실대 불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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