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민웅/신문의 힘 독자가 만든다

  • 입력 2001년 7월 19일 18시 33분


요즘 사회 일각에서 ‘권력’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정치 권력’이야 그렇다 치고 ‘언론 권력’ ‘문화 권력’ ‘사이버 권력’ 등 온갖 곳에 권력을 갖다 붙인다. 마치 ‘권력은 권력 이외의 모든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식이다. 권력의 의미를 넓게 파악하는 것이야 나무랄 일은 아니지만 분별 없이 사용하면 고약한 오해를 낳을 수 있다.

한때 신(新)마르크스주의 계열의 진보 인사들은 한국사회의 모순을 모두 지배 이데올로기의 작용으로 보는 이른 바 ‘이데올로기 환원주의’에 함몰했던 적이 있다. 그저 입만 열면 이데올로기였다. 이들이 1989년 현실 사회주의의 모델인 동구 공산권이 무너지자 한동안 방향감각을 잃은 채 방황하다가 최근에 들고 나온 게 바로 권력론이다. 이전에 이데올로기를 갖다 붙이듯 온갖 곳에 권력을 갖다 붙인다. 권력의 성격, 권력의 행사 방식, 권력의 효과 등을 따지지 않고 그저 권력 또는 권력 관계만 열심히 되뇌는 인사들이 더 많아 보인다.

언론 권력을 중심으로 한번 따져보자. 언론 권력의 기본적 성격은 영향력이다. 이것은 깡패들이 사용하는 폭력도 아니요, 권력을 잡은 집권세력이 의존하는 조세권, 검찰권처럼 법률이 부여한 권한도 아니다. 영향력은 오로지 독자의 자발적인 동의와 공감에 의해 발휘된다. 폭력이나 권한처럼 하기 싫어도 따라야 되는 것이 아니다.

동아일보 등 ‘빅3 신문’의 사회적 영향력이 큰 것은 이들 신문을 보는 독자가 많을 뿐만 아니라 이들 신문의 기사와 논평에 대한 독자의 공감 내지 동의 수준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솔직히 요즘 신문 개혁을 부르짖는 몇몇 신문과 ‘빅3 신문’의 정보력을 비교해 보라. 필자의 안목으로 보면 게임이 안 된다. 정보도 부실하고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논평이 대부분인 신문을 왜 보겠는가. 여러 번 지적했지만 독자는 바보가 아니다. 이렇게 볼 때 몇몇 신문과 TV방송은 ‘빅3 신문’의 여론 지배력을 탓하기 전에 먼저 독자와 시청자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기사와 논평을 보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일의 순서가 아니겠는가.

언론의 영향력은 모든 사회적 쟁점에 대해 언제나 한결같이 발휘되는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 상황 조건에 따라 그 영향력은 달라진다. 정부의 권한처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법 절차에 따라 집행되는 그런 권력이 아니다.

언론의 영향력은 크게 보면 일반 독자, 즉 여론에 미치는 영향력과 의사 결정권자에게 미치는 영향력으로 나눌 수 있다. 여론에 미치는 언론의 영향력이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도 민주사회의 의사 결정권자는 여론을 존중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독자는 물론 의사 결정권자가 언론의 보도에도 불구하고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잡아 가둘 수도 없고 강제할 수도 없다.

예컨대 작년 말 헌정사상 유례가 없는 정치적 농간인 ‘의원 꿔주기’가 단행됐을 때 ‘빅3 신문’과 요즘 신문 개혁을 부르짖는 친(親)여지, TV 뉴스는 말할 것도 없고 시민단체들까지도 ‘국민 모독 행위’라고 강하게 비판했으나 의사 결정권자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2차 의원 꿔주기’를 감행했다. 이처럼 언론의 영향력은 그 대상인 독자와 의사 결정권자가 자발적으로 수용하지 않으면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반면 집권세력이 발휘하는 권력은 싫든 좋든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강제력이 행사된다. 언론사 세무조사와 뒤이은 검찰 고발 사태만 해도 언론사가 원해서 그런 곤욕과 창피를 당하겠는가.

이런 점에서 세무조사도 푸코가 지적한 것처럼 권력의 의도를 추적하기보다는 권력 작용의 구체적인 효과를 추적하는 것이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는 방법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세무조사 결과 발표를 전후해서 한 달 남짓한 사이에 ‘빅3 신문’의 편집국장이 모두 바뀌었다.

지방자치단체 선거와 대통령 선거가 있는 정치 시즌이 눈앞에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빅3 신문’의 편집국장은 모두 정치부 경험이 전혀 없는 경제통들로 바뀌었다. 이미 권력의 오한 효과(chilling effect)가 나타나 비판 신문이 움츠러들기 시작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이민웅(한양대교수·언론학 본보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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