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며 생각하며]김향숙/국가유공자 제대로 보답했나

  • 입력 2001년 6월 5일 18시 28분


투명한 하늘과 푸른 잔디, 청산을 뒤로 하며 경이롭게 펼쳐지는 장엄한 신비의 모습으로 충만된 생명의 외경 속에 섬세하게 들려오는 환자분들의 신음소리. 울타리 너머에는 유혈의 장미 수줍게 인사하고 아카시아 꽃이 바람에 날리면 어느새 님들의 숨결 향기로 묻어나 6월에 머문다. 6월의 함성이 멈춘 지 어언 50여 년. 매일 넘쳐나는 전상의 상흔으로 보훈병원의 역사는 시작됐다.

▼보훈병원 환자들 불우한 노후▼

이렇게 6월이 오면 많은 애환들이 지나간 시간 속에 용해되어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이곳에 갓 들어와 병원 생활을 익혀갈 무렵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식사 때마다 다른 환자분의 식사를 거들던 분이 있었다. 월남전에 참전해 상이 1급의 중상을 입은 환자였다.

그분의 병상생활은 항상 활력에 넘쳐 있었고 부지런함과 유머로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몸인데도 그분은 일상생활을 스스로 관리했다. 비슷한 시기 다른 동료 환자 한 분이 아내와 헤어져 아직 미성년인 두 아이와 함께 병원에 남게 되자 그 분은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 두 집안의 생활비며 자녀 양육까지도 모두 책임졌다.

남을 도와주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살았던 그 분은 환자들의 대부였고 상담자로서 1인 다역을 여러 해 동안 소화해 냈다. 힘들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잃어버린 몸의 절반을 찾기보다는 남은 몸의 절반으로 그늘진 구석의 촛불이 되겠다면서 한결같이 몸을 태워가던 분이었다.

하지만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환자의 건강은 더 이상 거칠고 고단한 삶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 분의 하나님은 고통에서의 해방을 종용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렇게 뜨겁고 강렬했던 삶은 8월의 태양 속으로 영혼의 날개를 달고 훌쩍 떠났다.

강산이 두 번 변할 만큼 함께 한 세월이지만 어느새 그 분은 차츰 남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지고 있다. 환자분들의 일상에서 사람과의 만남이란 고작 병실에 드나드는 의료진과 가끔씩 찾아오는 동료환자, 통증을 호소하는 자신과의 고뇌에 찬 대화뿐이다.

이제 이곳 환자분들의 연령은 점점 높아지고 노인성 질환과 복합 질환으로 중환자군이 늘어만 가고 있다. 몇 년 전의 조사 결과를 봐도 입원한 국가유공자의 79%는 50세 이상이고 1∼3급 환자가 41%를 차지한다.

여기에 배우자와의 사별, 별거, 이혼 등으로 노후를 병원에서 불행하게 보내며 보훈연금에만 의지하고 살아가는 국가유공자 환자분들도 상당수에 이른다. 보훈병원에 입원한 환자의 44%는 월수입이 100만원이 안 된다. 사회에서 마땅히 존경받고 예우받아야 할 국가유공자들이 극도로 불안정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병실 여기 저기에는 오갈 곳 없는 만성 환자분들의 병상 점유율이 점차 높아져 정작 의료혜택에서 소외되는 유공자들도 늘고 있다. 때로는 환자분들이 잃어버린 젊음에 대한 보상 심리로 주위 사람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충분히 공감이 간다. 병원문을 지나가며 소리 없이 실망하는 환자 분들의 눈빛을 바라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

이 나라가 주권 국가로 존립하면서 민족 문화를 꽃피우고 번영과 발전을 누리는 것은 예외 없이 나라에 공훈을 세운 순국 선열과 국가유공자들의 고귀한 젊음이 지불됐기 때문이다. 국가는 그분들의 자긍심을 지켜주고 영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국가 보훈사업을 개선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반세기가 지났어도 전사자의 유해를 발굴해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미국의 국가적 노력을 보면 놀라울 따름이다. 2차대전에서 패배한 일본도 경제성장의 과실을 가장 먼저 참전 부상자들에게 돌려주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장기 요양시설 빨리 마련을▼

이제 한국도 외형에만 치우친 국가 보훈사업을 지양하고 선진의료 기술이 들어오면 유공자들도 똑같은 혜택을 받도록 하고 장기 요양시설을 마련해 노후의 삶을 보장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오늘따라 병원 나이만큼이나 훌쩍 자라버린 마로니에 나무의 싱그러운 이파리가 새로운 감회로 전해진다. 이렇게 6월이 오면 분주해지는 것은 님들이 항상 우리 곁에 머물기 때문이 아닐까.

김향숙(서울보훈병원 수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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