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26일 지리산서 '위령제' 여는 수경스님

  • 입력 2001년 5월 23일 18시 53분


10년 전 겨울 지리산 백장암에 살 때다. 산기슭에서 우연히 만난 폐가. 방문을 열자 고약한 악취가 풍겼다. 노인 한 사람이 그르렁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썩은 이불을 껴안고 죽은 듯 누워 있었다.

그날 이후

수경(收耕)스님(‘지리산 살리기 국민행동’ 상임대표)은 매일 찾아가 밥과 물을 갖다 주고 불도 때고 청소도 했다. 그렇게 한달여가 지났을 무렵, 노인이 마음을 열었다. 인민군으로 내려왔다 체포된 노인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 남았다고 했다.전향하고 사회로 나왔지만 고문의 후유증으로 대인(對人)공포증에 시달렸고 영양실조로 눈까지 멀었다. 평생 선방과 절집만을 오가며 바깥 세상과는 담을 쌓았던 수경스님은 분단과 좌우대립의 한국 현대사에서 걸어나온 듯한 한 인간에게서 연민을 느꼈다. 9년 전 그 노인을 시설 좋은 무료 양로원에 맡기고 돌아오면서 그걸로 인연이 끝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인연이 계속되고 있는 탓일까. 수경스님이 26일 지리산 달궁에서 건국 후 최초로 빨치산 유족들과 군경 유족들이 만나는 지리산 위령제를 준비하고 있다.

수경스님은 위령제에 앞서 3∼18일 경남 함양 산청 하동 구례 남원을 거쳐 다시 함양으로 오는 지리산 850리를 종교계 환경운동단체 회원 30여명과 함께 걸었다. 도보행진하는 동안 빨치산 유족들과 양민학살 현장, 군경 유족들을 모두 만나보았다. 13일에는 빨치산 ‘남부군’ 사령관으로 유명한 이현상(李鉉相)의 넋을 위로하는 위령제를 그가 사살된 지리산 빗점골 현장에서 열기도 했다.

“남북(南北)은 화해 분위기인데 정작 남남(南南)은 깊은 갈등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이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이번 행사에는 ‘생명평화 민족화해’를 기치로 군경과 빨치산 유가족들뿐만 아니라 천주교 기독교 원불교 불교 유교 천도교 등 범종교인들, 환경운동연합 등 100여개 시민단체 대표들이 참여한다. 좌우대립의 와중에서 지리산에서 숨을 거둔 군경 빨치산들의 위패 5000여개도 함께 마련됐다. 참여 문의는 02―720―1654

<허문명기자>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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