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허영/무리한 인사가 '충성' 불렀다

  • 입력 2001년 5월 23일 18시 27분


충성 다짐을 하면서 법무부장관에 취임한 안동수 변호사가 부임 43시간 만에 물러났다. 이번 인사 사건은 국정의 난맥상을 그대로 표출하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나마 발빠른 인사조치마저 없었다면 국민은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검찰총장위해 장관 바꾸다니▼

특정인을 검찰총장에 앉히기 위해 지휘감독권을 가진 법무부장관을 바꾼 것부터가 고위공직자에 대한 인사의 정도(正道)는 아니다. 대표적인 사정기관의 장들이 모두 특정지역 출신이라는 따가운 눈총을 피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면 더욱 한심한 일이다. 능력위주로 사심 없이 공정하게 발탁한 것이라면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이 같은 지역 출신인들 어떻단 말인가. 흔히들 비판하는 이른바 ‘오기의 정치’는 바로 그런 경우에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번 인사를 포함해서 고위 공직자 인사를 할 때마다 출신지역을 따져야 할 정도로 지역성에 신경이 쓰인다면 김대중 정부의 인사정책은 크게 잘못되어 온 것이 분명하다.

인사가 만사라는 진부한 이야기를 새삼 꺼낼 필요도 없다. 충성맹세를 하지 않고는 임명권자에 대한 감사의 뜻을 달리 표현할 줄 모르는 균형감각을 상실한, 검증되지 않은 인물을 어떻게 파사현정을 실현할 대표적인 사정기관의 장으로 발탁한단 말인가. 그런 인물을 추천한 사람도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이번 인사의 가장 큰 문제점은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의 인사서열상의 위상을 뒤바꾸어 놓았다는 점이다. 짧은 평검사 경력밖에 없는 실패한 정치 지망생이 임명권자의 ‘성은’에 힘입어 법무부장관이 되고, 검찰의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대검차장 출신이 검찰총장을 맡는다면 과연 법무부장관이 검찰총장에 대한 지휘감독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검찰조직 전체의 자존심과 명예를 무너뜨린 졸작 중의 졸작인사가 아닐 수 없다. 검찰은 어느 조직보다 서열과 경력을 중시하는 기관이다. 그런데도 경력과 서열을 무시하는 파격적 인사를 서슴없이 하는 것을 보면 실세인 검찰총장을 위해서 법무부장관을 허수아비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다.

검찰총장 인사만 해도 그렇다. 신승남 신임 검찰총장이 검찰 내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신망이 두터운 우수한 사람이라는 점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다. 그럴수록 인사권자는 그런 인재를 아낄 줄 알아야 한다. 그 사람을 검찰총장에 임명하기 위해 직위상의 상관인 법무부장관을 특별한 이유도 없이 해임하는 모습의 인사를 하는 것은 진정으로 인재를 아끼는 것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인사권자가 아끼고 싶은 인재가 그로 인해서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된다면 가뜩이나 독립성을 의심받는 검찰이 검찰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겠는가.

이번 인사사건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느껴지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중심을 잃고 표류하고 있는 총체적인 국정 난맥상을 그대로 보는 것 같아 걱정이다. 김대중 정부가 이런 식으로 정권말기의 누수현상을 자초한다면 앞으로 남은 1년 반을 어떻게 지탱할지 걱정이다.

정부와 여당은 하나에서 열까지 정권재창출에만 매달릴 일이 아니다. 이번 일을 교훈삼아 바른 정치를 하는 방향으로 목표를 다시 정해야 한다. 정권재창출은 민심을 사야 가능하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다. 무리한 인사정책이나 검찰권의 장악으로 되는 일은 절대 아니다. 지금처럼 민심 이반이 심각한 상황에서 검찰권을 장악해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바른 정치의 교훈으로 삼길▼

검찰인사를 둘러싸고 이런저런 의혹과 잡음이 많으면 많을수록 검찰의 힘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검찰권을 정치권으로부터 독립시켜 순수한 사정기관으로서 제 길을 가게 하는 것이 오히려 정권 재창출에 도움이 될 것이다. 대통령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정권 재창출에 노력하는 법무부장관이 아니라, 국민에게 멸사봉공을 약속하고 검찰을 정치권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앞장서는 법무부장관을 임명하는 것이 정권재창출의 지름길임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이번 인사해프닝은 전화위복이 될 것이다.

어려운 상황에서 검찰총수가 된 신임 검찰총장은 자신을 둘러싼 의혹의 눈길이 한낱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만이 후유증을 신속하게 해소하는 길이다. 또 그것이 임명권자에 대한 최대한의 충성이다.

허영(연세대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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